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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인사 청문회 해야 할 이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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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새 정부 연립여당이 될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국정공백이 우려된다며 첫 조각 (組閣) 때는 인사청문회를 예외적으로 거치지 말자고 한다.

참으로 옹색한 논리다.

원활한 국정수행을 위해 청문회를 생략하겠다는 주장은 모순이다.

인선안 (案) 을 발표해 '언론검증' 을 거친다는 발상도 사려 깊지 못하다.

첫 내각때부터 인사청문회를 반드시 실시해야 할 이유가 있다.

첫째, 국가적 위기가 크면 클수록 국민이 널리 공감할 수 있는 인재들을 국가경영에 투입해야 위기관리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시작이 반이다.

임명에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것은 작은 문제지만 기본적 검증이 부족한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언론검증' 은 우선 논리적으로 무리다.

언론이 수행하는 사회감시란 국민의 비판기능이다.

주로 민간조직인 언론은 선거를 통해 국민의 권리를 위임받는 국민대표기관이 될 수 없고 돼서도 안된다.

행정 최고책임자가 요직에 기용하려는 사람을 국회가 법에 따라 동의 또는 거부할 수 있게 한 것은 권력분립원칙에 따른 것이다.

국민들은 행정부와 입법부에 일단 위임한 권한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권한행사의 잘잘못을 언론을 통해 비판할 수 있을 뿐이다.

둘째, 권력엘리트 집단의 순환과 통풍 (通風)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다.

일찍이 1789년 미연방헌법제정회의에 대표로 참석했던 알렉산더 해밀턴을 비롯해 저명한 정치사상가들은 주권재민 (主權在民) 이론에 충실한 국민의 정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다.

한국 같은 후발민주주의는 두말할 것도 없고 서구 선진국들의 정부도 명목상으로 일인통치든 다수통치든지 간에 '특권적 소수에 의한 민주주의' 라는 모순을 드러낸다.

일반국민들은 투표도 하고 때로 권력에 저항도 하지만 최소한의 정치적 권리행사일 뿐이다.

대형비리로 구속된 실세들이 며칠 안돼 풀려나는가 하면 대 (對) 국민공약을 무시한 정권들도 재집권에 성공한다.

정권교체는 권력집단의 순환과 통풍을 통해 부패와 전횡의 완화를 돕지만 이 과정에서도 '악화 (惡貨)가 양화 (良貨) 를 구축한다' 는 그레셤의 법칙이 작용한다.

인사청문회는 이 법칙을 억제하는 데 기여한다.

YS정권은 출범부터 자질이 의심스러운 권력엘리트 정부라는 비판을 받았고 마침내 국난을 빚었다.

새 정부는 권력집중이 심한 대통령제하에서 정권교체의 보완장치인 인사청문회 실시공약을 처음부터 지켜 현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할 것이다.

셋째, 인사청문회는 장기적으로 정치적 가치관의 확립을 돕는다.

선진국의 경우와 달리 한국의 권력엘리트 대다수는 공익에 봉사하는 헌신성과 도덕성을 함양하는 정치적 학습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새 정부는 차세대 정치지도자들이 이 과정에 성실해야 한다는 점을 전달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출범때부터 보여줘야 한다.

넷째, 민주적 제도형성을 돕는 인사청문회를 한시라도 늦출 필요가 없다.

YS정권은 제도화에도 실패했다.

제도화는 대통령의 국가경영 능력을 보완해준다.

고령의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은 재임시에 주요 안건들은 잘 살피지 않고 결재한 적이 많았음에도 잘 기능하는 제도들의 도움으로 대과 (大過) 없는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인사청문회란 천사를 찾아내는 장치가 아니다.

권력주변에 천사란 없다.

인사청문회는 악마들 가운데 덜 위험한 악마를 골라내는 제도일 뿐이다.

영국 비평가 윌리엄 해즐릿의 말처럼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도덕적 원칙을 좇지 않는다.

더욱이 건국 이후 여태까지 파행적 권력추구규칙들로 오염된 한국 정치현실에서 누가 누구에 대한 엄격한 검증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여당은 인사청문회 공약을 처음부터 지키면서 야당의 협력을 솔직히 호소하는 큰 정치를 택해야 한다.

야당도 청문회를 정파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

지금 이 단계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청문회라는 제도가 가져올 풍성한 결실이 아니다.

그 씨앗을 뿌리려는 순수한 성의가 더 중요한 것이다.

안영섭〈명지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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