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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을 찾아서]투옥 작가 황석영 "풀려나면 정통소설로 승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우리 소설의 참 맛을 보여주겠다." 투옥 중인 작가 황석영 (黃晳暎.54) 씨가 소설 창작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89년 밀입북 후 독일등 제3국을 떠돌다 93년 4월 귀국 즉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된 황씨는 현재 충남 공주교도소에서 5년째 수감 중이다.

그런 그가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사면 가능성을 앞두고 출판사와 선.후배 문인들에게 옥중 서신등을 통해 주체 할 수 없는 창작 의지를 호소하고 있다.

"제 나이도 어느덧 50대 중반에 이르렀습니다.

감옥에서 이제 다섯번 째 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나가면 한적한 곳에 틀어 박혀 그동안 못 쓴 소설 창작에만 몰두하겠습니다." 며칠 전 황씨로부터 이런 내용의 편지를 받은 한 선배 문인은 황씨가 어서 풀려 나와 민족 소설의 도도한 흐름에 보탬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황씨가 구상을 마친 소설은 5편 가량. 일단 일제 식민지하 황해도 신천 지방을 배경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다룬 작품인 '손님' 을 쓸 예정이다.

손님은 마마, 즉 천연두를 이르는 말로 일제 시대 한반도에 번진 전염병이다.

외래 사상이나 풍조, 이데올로기를 무조건 추종하던 당대의 세태를 이런 마마의 창궐과 함께 그리며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찾아나가게 된다.

다음으로는 한 장기수의 귀향 이야기를 다룬 '오래된 정원' .출옥 후 고향을 찾아가는 길에 만난 여인과의 사랑을 통해 이념에 대한 맹종이 어떻게 개인적 사랑의 감정 혹은 인간성을 파괴해 나가는지를 다루게 된다.

또 한편은 일종의 노동소설로 영등포 철도공작창과 한 기관사를 중심으로 산업사회에서의 진정한 노동의 의미를 찾을 예정이다.

이밖에도 몇 편의 중.장편이 그대로 글로 옮겨놓으면 될 정도로 머리에 빼곡히 정리돼 있다고 황씨의 편지들은 밝히고 있다.

황씨는 수감 후 새로 나온 소설들을 샅샅이 읽고 또 공주교도소 도서관에 공급, '신간 소설의 최대 장서가' 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읽고 난 뒤의 평도 꼼꼼하게 출판사 관계자나 작가에게 적어 보낸다.

신경숙씨의 내면적 문체가 좋고 은희경씨의 도시적 감수성이 뛰어나다는 식으로 현재 우리의 젊은 소설계까지 교도소 안에서도 훤히 꿰뚫고 있다고 그를 자주 면회한 문단 관계자는 밝히고 있다.

황씨는 처음에는 수감 중 '황석영판 삼국지' 를 쓸 예정이었다.

해서 '삼국지' 원본과 소설가 박태원이 1941년 번역한 삼국지, 그리고 한자 사전을 차입해 들였다.

번역판 중 가장 완벽하고 재미 있는 '삼국지' 를 펴내겠다는 생각은 그러나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90년대 들어 형편없이 흘러가고 있는 소설을 바로잡아야 되겠다는 각오에서다.

"시대와 현실.사회로부터 동떨어진 개인적.감각적 소설이 판을 치고 있다" 는게 황씨의 90년대 우리 소설에 대한 평. 때문에 소설은 어떠해야 한다는 한 '모범' 을 보여주기 위해 오늘도 작품 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그리고 석방되면 대하 역사물보다 근.현대와 동시대를 다룬 중.장편 본격.정통 소설로 승부를 걸겠다고 황씨의 편지들은 전하고 있다.

황씨의 머리 속에 있는 소설들은 모두 한 출판사에서 출간하기로 하고 이미 암묵적으로 계약이 돼 있는 상태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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