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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민·보육원생·쉼터생 … 가족이 그리운 10대 4명 가족 만들어 요리왕 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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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가족’이라는 단어에 한결같이 가슴 시린 표정을 지었다. 혼자 남매를 키우는 어머니가 안쓰럽다는 이태현(17)군, 친부모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추진희(17)양, 북한에 언니와 남동생을 두고 온 김민지(19·가명)양, 가정폭력을 피해 쉼터에서 사는 지혜(18)양.

요리를 할 때 가장 신이 난다며 ‘해피쿠킹스쿨’ 학생들이 조리 도구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왼쪽부터 추진희·김민지(가명)양, 이태현군, 대학생 멘토 김상은씨. 지혜양은 개인 사정으로 함께 사진촬영을 하지 못했다. [박종근 기자]


서울 종로구 한 요리학원에서 4명의 청소년을 만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준비 중인 민지양을 빼면 모두 고등학생이다. 이들은 밤 10시를 넘긴 시간까지 요리 연습에 몰두해 있었다. 돼지고기 튀기는 냄새가 고소했다.

이들은 SK그룹이 저소득층 청소년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요리학교 ‘해피쿠킹스쿨’에 다닌다. 7일 열리는 ‘우리돼지요리 경연대회’에 대비해 연습하는 중이었다. 총상금 1억원(학생부문 우승상금 300만원)이 걸린 전국대회다. 대학생 멘토 김상은(22·세종대 분자생물학과)씨까지 5명이 팀을 이뤄 7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학생부문 본선에 나가게 된 것이다.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초보 요리사들에겐 꿈 같은 기회다.

◆가족은 상처이자 희망=태현군은 돼지고기를 손질하는 모습이 능숙해 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이 헤어진 뒤로, 일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여동생에게 직접 밥을 해줬다. 중학생이 될 무렵엔 잡채·냉이무침을 만들어 어머니 생신상을 차릴 정도가 됐다. “어머니가 식당일 하느라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고생하시거든요. 제가 만들어드린 음식을 맛있게 드실 때가 제일 기뻐요.” 태현이는 그렇게 요리사의 꿈을 꾸게 됐다.

진희양은 네 살 때 한 살 터울의 오빠와 서울 양천구 보육시설에 들어왔다. 이후 일곱 명의 아이와 함께 생활지도사를 ‘엄마’라 부르며 자랐다. “중학교 땐 공부하기 싫어서 학교도 가끔 빼먹었어요. 엄마가 속상해 하시는 걸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죠.” 그는 “요리사가 돼서 돈을 많이 벌면 나 같은 아이들을 후원해 주겠다”고 했다.

민지양은 지난해 엄마와 함께 탈북했다. 북한에서도 호텔 주방장이 꿈이었다. 외국인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실컷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이곳에서 새로운 요리를 배울 때마다 북에 남은 언니와 남동생이 떠오른다고 했다. 민지는 “지금도 감자·옥수수 섞인 밥을 먹을 텐데… 세상에 이런 음식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고 목멘 소리로 말했다.

“돈을 벌고 여건이 되면… 직접 꾸민 부엌에서 제 아이들에게 밥을 차려주고 싶어요.” 지혜양이 한참 뜸을 들이며 건넨 꿈은 이렇게 소박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이 헤어진 뒤 아빠·언니와 살았다. 언니는 2~3일에 한 번씩 술을 마시고 손찌검을 하는 아빠를 피해 집을 나갔다. 지혜도 2년 전부터 쉼터에서 산다. 어려서부터 밥을 하다 보니 요리는 자신있다. 아버지에겐 가끔 깻잎무침 같은 밑반찬을 만들어 찾아간다.

◆우승의 꿈=이들은 꼭 우승하자고 다짐했다. 대회 입상 경력이 요리사의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에서다. 팀장 김상은씨는 “대부분 호텔 조리학과 진학을 꿈꾸며 적극적으로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상은씨가 지은 팀 이름은 패밀리(family)다. “요리라는 게 가족을 떠올리게 하잖아요. 그렇게 따뜻한 느낌을 주는 요리를 하면 좋겠어요.” 이들은 이미 서로에게 가족이 돼가고 있었다.

임미진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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