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금아 피천득 선생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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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피천득의 ‘오월’)

저는 지금 오월 속에서 숨쉬고 있지만, 피천득 선생님의 오월은 2년 전 멈춰버렸습니다. 피 선생님은 백수연(白壽宴) 약속을 어기시고 당신의 생일(5월 29일)을 나흘 앞둔 25일, 98세로 돌아가셨습니다. 폭포 같은 세월 속에 기억도 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일까요. 정말 다행인 것은 지금도 선생님의 하이톤 목소리, 가느다란 손목의 촉감을 제 귀와 손끝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아마도 제가 어렸을 적부터 35년 넘게 피 선생님을 뵈어 익숙해져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은 아주 감동이 많으셨습니다. “아! 이 모란 봐라. 예쁘지!” “저 아기들 봐. 와! 눈이 참 맑지.”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 티셔츠를 양복 안에 입으시고 외치시던 “대~한 민국!”, 그리고 천진스레 웃으시는 어린애 모습…. 가끔씩 목욕탕 데이트(?)를 하고 난 후 우동 한 그릇을 함께 나누며 선생님은 “조선시대 왕들도 이런 호강은 누리지 못했을 거야”하셨지요. 사실 그땐 그런 소소한 게 그렇게까지 좋은지 몰랐었습니다. 그저 선생님 특유의 감탄사 정도로 여겼지요.

언젠가 전 스승의 날 행사 준비를 위해 모인 동창들에게 “지금까지 내 인생의 스승은 오직 피 선생님뿐이다”고 단언했습니다. 저를 유달리 아껴주셨던 다른 선생님께는 죄송했지만 제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영문학자이며 한국 최고의 수필가이신 선생님께선 저에게 영어를, 글 쓰는 비법(?)을 한 번도 가르쳐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삶을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하고 스스로 그 방법을 찾도록 도와준 분은 분명 피천득 선생님입니다.

“세상에 가진 것을 다 버려도 자기 자신만은 버려서는 안 된다.” 그걸 선생님은 말뿐이 아니라 온몸으로 보여주셨지요. “더 이상 좋은 글을 쓸 수가 없다”고 절필을 선언하시고 나선 아무리 생활이 궁색해도 새 글을 팔지 않으셨고, 누군가 상금이 큰 문학상 수상을 권했을 때도 선생님은 결코 자신과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출판과 저널리즘에 관련해선 ‘Something of Everything, Everything of Something’을 늘 잊지 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다양한 분야를 조금씩이라도 배워야 하고,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확실히, 그리고 철저히 알아야 한다”는 말씀은 편협하고 게으르기 쉬운 저에게 매서운 채찍이었습니다.

피 선생님처럼 약속과 정직을 ‘당연함’으로 보여주신 분을 전 아직 뵙지 못했습니다. “평생 시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 것 같아.”(저와의 약속 때도 꼭 30분 전에 오셨지요), “거짓말이 허락되는 경우는 그렇게 안 하면 동지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게 될 때뿐, 그때라도 침묵으로 대답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는 말씀을 하셨던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늘 진실의 화신으로 존경하셨지요.

참으로 전 행복한 놈입니다. 언제라도 생각만 하면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있고, 음성도 곁에 있는 것처럼 들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며칠 내 선생님께서 누워 계신 모란공원으로 빨간 장미를 들고 찾아가 뵈어야겠습니다.

김성구 샘터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