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막 죽어 나가 너무 놀라, 차라리 혼자 죽을 걸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자살 카페 개설자 정씨는 경찰에 구속되기 전 대구에 있는 한 정신과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다. 28일 병원에 가는 그의 뒷모습을 정씨의 허락을 받아 촬영했다. [프리랜서 공정식]

 4월 강원도에 ‘집단 자살 공포’가 엄습했다. 보름간 다섯 차례에 걸쳐 남녀 21명이 동반 자살을 시도했고, 이 중 12명이 숨졌다. 이들 자살 사건엔 자살 카페 ‘suicide04’의 회원이거나 한때 회원이었던 사람이 한두 명씩 끼어 있었다. 경찰은 올 3월 한 포털 사이트에 ‘suicide04’를 개설해 운영해 온 정모(21)씨를 자살 방조 혐의로 지난달 30일 구속했다. 구속되기 전인 27·28일 이틀간, 정씨를 만났다.

경남 합천의 한 허름한 농가. 마당에는 녹슨 경운기와 암소 한 마리가 있었다. 할머니 한 명이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한 청년이 방 안에서 인터넷을 하고 있었다. 큰 키(1m82㎝)에 비쩍 마른 그는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 개지 않은 이불, 바랜 벽지, 컵에 수북이 쌓인 담배 꽁초, 널브러진 맥주 페트병, 쓰레기 뭉치가 보였다. 청년은 ‘suicide04’의 개설자다. 앉아만 있어 관절이 좋지 않고, 엉덩이 한쪽에 염증이 있다고 했다.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하얀 얼굴은 앳되고 곱상했다. 뿔테 안경 너머의 눈매는 가늘었다.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했다.

-가족이 어떻게 되나.

“할머니(78)와 둘이 산다. 동생(고교생)은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한다.”

-부모님은 어디 있나.

“내가 7세일 때 이혼했다. 그 뒤 할머니·할아버지와 살았다. 할아버지는 3년 전에 돌아가셨다.”

-고교 1학년 때 자퇴한 뒤 어떻게 지냈나.

“집에만 있었다. 인터넷으로 게임을 하거나 TV·영화를 본다.”

-주로 어떤 게임과 영화인가.

“축구 게임을 자주 한다. 영화는 ‘텍사스 전기톱 연쇄 살인사건’ 같은 공포물을 많이 보는 편이다. 불에 타 죽는 악몽을 꾼다.”

-친구는 없나.

“없다. 아주 가끔 만나는 친구가 하나 있지만….”

-suicide04는 왜 만들었나.

“죽으려고 만들었다.”

-그런데 당신은 죽지 않았다.

“부산 사는 25세 여성과 함께 죽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실행에 나서려고 하니까 여자가 ‘너무 두렵다’며 연락을 끊었다.”

-어떻게 회원을 모았나.

“지식인 검색을 통해 쪽지를 보냈다. 내가 직접 모은 인원은 10명쯤인 거 같다.”

-나머지 회원은 자발적으로 모였다는 뜻인가.

“횡성에서 자살한 20대 남성 회원이 많이 모았다. 한때 회원 수가 30명까지 느는 걸 보고 놀랐다.”

-카페에 ‘자살을 시행하기 전엔 카페의 흔적을 없애라’는 공지를 띄우지 않았나. 왜 그랬나.

“죽음은 완전한 끝이니까…”

-죄책감은 없나.

“처음엔 아무 생각 없었다. ‘다 나 같으니까 죽으려 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 죽어 나가니까, 너무 놀랐다. 다시는 카페를 만들지 않을 거다.”

카페는 포털이 아닌 정씨가 직접 폐쇄했다. 정씨는 지난달 20일 횡성경찰서에서 1차 조사를 받았다. 집에 돌아오니 포털 측에서 ‘카페 일시 활동 중지’ e-메일을 정씨에게 보내왔다. 일부 회원이 “경찰에서 연락 왔다. 내 얘긴 경찰에 하지 마라”란 쪽지를 보냈다. 정씨는 스스로 카페를 닫았다. 경찰 관계자는 “포털은 수사 이전엔 이 카페를 스크린하지 못했다. 회원의 탈퇴·가입 여부도 확인할 수 없다고 전해왔다”고 말했다.

-가족 생각은 안 하나.

“의미 없다. 키워 주지도 않은 아버지가 가끔 연락한다. 일자리가 있는지 없는지, 연락할 때마다 돈을 부쳐 달라고 한다. 할아버지가 남긴 작은 재산과 논도 탕진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보고 싶어 외갓집에 찾아갔는데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차라리 낳지 말지, 이럴 거면 왜 낳았을까.”

-동생은 어떤가.

“공부를 잘한다. 논술 경시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아무도 나에겐 신경 쓰지 않는다. 동생은 있는데, 나는 없다.”

-우울증이 있나.

“지난해 여름부터 심해졌다. 고통은 말로 표현이 안 된다. 그러니까… 완전히, 아무런 의욕이 없는 그런 거다. 이대론 죽을 것만 같아 지난해 10월 병원에 찾아갔다.”

정씨는 취재진이 찾아간 다음 날인 28일 대구의 한 병원에 갔다. 정신과 통원 치료 중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울증 약을 하루에 두 번씩 먹는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모두가 자신의 욕을 하고 있는 듯 느끼는 피해망상증도 있다.

-여름부터 심해진 이유가 따로 있나.

“집안에 불화가 있었다. 아버지와 관련된 일이다.”

-그게 전부인가.

“지난해 8월 대입검정고시를 패스했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해 3~4개월 공부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검정고시 붙으면서 우울증이 심해졌다. 시험 붙으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험 붙고 알았다. 이런 게 내 생활과 미래를 전혀 바꿔 놓을 수 없다는 걸.”

카페 ‘suicide04’의 ‘04’는 ‘공포’란 의미일 거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돌았다. 그러나 정씨의 휴대전화 끝자리일 뿐이다. 정씨는 “차라리 혼자 죽을 걸, 말 못할 죄책감뿐”이라고 했다.

강인식 기자, 사진=프리랜서 공정식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