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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문화혁명]3.현란한 하이브리드 현상(1)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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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고급은 저급이다.'

뉴욕타임스지가 지난해말 특집으로 마련한 21세기 문화전망에서 내놓은 선언이다.

문화장르간의 벽 허물기와 장르간의 결합이 가속화돼 장르구분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물론 급기야 고급문화.대중문화의 구별마저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미 세계 문화계에는 장르 허물기가 하나의 도도한 물결을 이루고 있다.

제각기 발전해오던 음악.미술.연극.무용.영화등 문화는 최근 들어 서로의 몸섞기를 통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혁명적인 혼성문화, 토틀문화의 시대를 열고 있는 것이다.

영국 템즈강의 런던브리지.타워브리지.웨스터민스터브리지 양안의 10평방 마일을 일컫는 센트럴 런던. 극장과 식당가가 즐비한 이곳은 언제든 한꺼풀만 더 열고 보면 문화변화의 단서를 잡아낼 수 있는 곳이다.

이곳 중심가에 여섯개 거리가 만나는 피카딜리 서커스 광장의 뒷골목인 덴만스트리트에 자리잡은 피카딜리극장. 지난해 12월, 그동안 남자무용수만으로 동성애 분위기가 넘치는 '백조의 호수' 를 무대에 올리는등 언제나 첨단을 달린다는 평을 받았던 극단 AMP가 다소 진부한 '신데렐라' 를 공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본래의 평가는 그대로 유효했다.

이 공연은 딱히 이름붙일 장르가 없었다.

연극과 무용을 적절히 배합한, 뮤지컬 스타일의 혼성 퍼포먼스라고 막연히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없었던 혼성형태의 공연이기 때문이다.

배경은 폭격이 퍼붓는 2차대전 중의 런던. 줄거리는 서양동화인 신데렐라의 기본 골격을 적절히 재구성하고 있다.

지난해 봄 처음 시작해 지금까지 연일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공연의 흡인력을 짐작하기 충분해 보인다.

뮤지컬의 요소가 강한데도 음악은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 작가 프로코피에프 (1891~1953)가 1945년에 작곡한 발레음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이즈 차림으로 발가락을 꼿꼿이 세운 발레는 결코 아니었다.

자연스런 연극형식이면서도 군데군데 춤이 등장할 뿐이다.

이 공연에서 춤은 하나의 표현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춤이 등장하는 부분은 극의 내용이 격정적이라고 보면 된다.

무대장식이나 의상.배우들의 동작이 다분히 뮤지컬적이다.

현지의 비평가들이 이 공연을 두고 '노래없는 뮤지컬' 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장소를 잠시 옮겨 런던의 서쪽 해머스미스의 퀸 캐럴린거리에 위치한 라바츠 아폴로 극장. '금세기 마지막 런던 공연' 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리버 댄스' 가 한창 공연 중이다.

모야 도허티 제작, 빌 윌런 작곡에 존 맥컬건이 연출한 이 공연 역시 어떤 장르라고 말하기 힘들다.

탭댄스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집시춤 등 다양한 춤이 혼합되고 있었다.

춤만이 아니다.

연극적 요소가 더해졌고 아일랜드 고유의 멜로디가 흘렀다.

뮤지컬 같기도 하고 동네 축제 같기도 한 독특한 분위기였다.

아일랜드 시골의 전통과 대도시 서민문화풍이 결합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94년 봄 아일랜드 국립방송인 RTE의 지원으로 더블린 무대에 처음 올려진 이래 지금까지 미국.영국에서 4백여만 명이 관람했고 비디오 테이프만도 5백만장 이상 팔려 20세기 가장 성공적인 문화상품으로 손꼽힌다.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 눈길을 돌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영국산 뮤지컬 '미스 사이공' 이 런던의 문화중심지인 웨스트엔드의 드루리레인 시어터 로얄에서 계속 공연되고 있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고 미국으로 건너가서까지 10년 세월을 롱런하고 있는 배경은 뭘까. 알랭 부빌과 미셸 쇤버거가 제작하고 니콜라스 힌터가 연출을 맡은 이 뮤지컬은 관객을 눈물을 짜내는 멜로 드라마적인 성격이 강하면서도 스펙타클한 무대장면에선 영화를 연상케도 한다.

사 이공이 함락되던 날의 무대. 미국인과 피난민들이 사생결단으로 헬리콥터에 매달리는 대목에서는 실물의 대형 헬리콥터가 등장했다.

사이공에 입성한 북베트남군이 벌이는 퍼레이드, 방콕의 환락가등을 재현한 연출 역시 압권이었다.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서사극과 멜로 드라마와 영화에서 본 듯한 장면이 아무 저항없이 한데 어울어졌다.

아울러 동서양인들간의 윤리관과 사고방식, 감정의 미묘한 차이까지 고스란히 같은 무대에 펼쳐보이고 있는 것도 강점으로 보였다.

이런 문화상품들이 그렇게 매력적인 배경은 무엇일까. 뉴욕타임스지의 21세기 전망대로 장르간 벽 허물기, 즉 '문화 하이브리드 (hybrid)'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하이브리드라는 어휘는 우리말로 '동.식물의 잡종' '혼성물' 등으로 옮겨지며 주로 '잡종옥수수' 처럼 사람들이 식물의 생산성이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종 (種) 을 결합해 생기는 결과물을 일컫는다.

그래서 문화 하이브리드도 다양한 장르의 결합으로 우수한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 호소력은 대부분의 장르를 총체적으로 혼합한 '영화' 가 불과 1백여년만에 가장 각광받는 문화상품이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악극으로 유명한 19세기 독일 작곡가 바그너의 평소 지론을 되새겨볼 만하다.

"오페라의 근본적인 오류는 음악이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는 점이고 드라마는 단지 그 음악의 변명으로만 봉사했다.

그래서 오페라의 모든 요소가 완벽히 어우러져 모든 요소가 다 완벽한 그런 작품을 창작하고 싶다."

바그너의 총체극 개념이 20세기 말에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인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올 봄 시즌에 선보일 '필름하모닉 시리즈' 는 심포니와 컴퓨터 영상의 대담한 만남이어서 혁명적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음악도 20분 정도 길이로 새롭게 작곡하고 음악의 내용에 맞춰 컴퓨터로 첨단영상을 만들어내는 프로젝트다.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할리우드의 작곡가와 감독은 제리 골드스미스, 대니 엘프먼, 앨런 실베스트리, 팀 버튼 등 무려 50여명. 첫 작품은 '천일야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은 봄 시즌에 하이든과 베토벤의 작품에다가 이 작품을 '미끼' 로 영상세대들을 클래식의 세계로 끌어들인다는 계획이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인 에사페카 살로넨은 지난 12월 "전세계의 다른 교향악단들도 머지않아 영상과 교향악을 결합한 이 작품들을 레파토리로 선택할 것" 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문화 하이브리드의 의미가 고매하더라도 관중들이 외면하면 결국에는 사장되고 만다.

소위 말하는 고급문화도 이제는 저변확대를 위해 대중적인 장르와 결합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세계문화계에서는 장르간 벽이니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은 옛말이 된지 오래다.

장르간 구분을 없애고 서로의 특성을 합침으로써 새로운 즐거움과 가치를 만들어내고 문화의 자생력과 경쟁력을 높이는 문화 하이브리드는 21세기를 여는 도도한 문화혁명의 중심선상에 있다.

뉴욕.LA.런던 = 김상도.정명진.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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