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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김영희 칼럼

북한판 ‘바보들 행진’의 종착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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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북한은 오바마 연설의 청취율을 높이는 박수부대 노릇을 제대로 했다. 오바마 연설 직전에 단행된 북한의 로켓 발사로 오바마의 핵군축 연설은 현실감과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의 고문 웬디 셔먼은 북한이 로켓 발사로 오바마에게 큰 선물을 줬다고 논평했다.

대선 후보 오바마가 불량국가들과 대화하겠다고 여러 번 말할 때만 해도 그의 머릿속에 구체적인 북한상(像)은 없었다. 프라하 연설 때까지도 국무부 동아시아 정책 팀의 구성도 끝나지 않았다. 그런 오바마의 머리에 북한 스스로 대량살상무기를 추구하는 나라, 핵무기로 체제를 유지하려는 나라, 핵·미사일 수출로 경제를 지탱하려는 시대착오적인 나라의 이미지를 확실히 심어준 것이 4·5 로켓 발사다. 그런 북한이 오바마 정부가 자신에게 대화의 손을 내밀지 않는다고 보기에도 안쓰러운 온갖 생떼를 다 쓴다.

유엔 안보리가 지난 4월 의장성명으로 북한 제재를 결정한 것은 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한 대응이었다. 원인 제공자인 북한이 안보리가 사과하지 않으면 다시 핵실험도 하고 대륙간탄도탄(ICBM)도 발사하고 우라늄 농축 방식으로 핵개발도 하겠다고 위협한다. 그런 적반하장도 모자라 개성공단에서 한국인 직원을 억류하고 북·중 국경에서 붙잡은 미국인 여기자 2명을 간첩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이런 걸 ‘바보들의 행진’이라고 한다면 너무 신사적인 표현이다.

김정일도 사정은 급할 것이다. 그의 건강이 나쁘니 자연히 체제가 불안하다. ‘김일성 왕조’의 권력을 아들에게 세습하고 싶은데 아들 셋 중 세자(世子)로 흡족한 후보가 없다. 2012년까지 강성대국 끝낸다고 선군정치를 펴고 보니 군인들의 발언권이 웃자라버린 것도 걱정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흥정으로 경제와 체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고 한다. 핵·미사일 포기, 잘하면 동결 정도의 대가로 경제 지원을 받으면 경제 문제가 해결된다. 북·미 대화로 전체적인 합의를 해놓고 한국과 중국을 참여시켜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아들 세대에 물려 줄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는다. 그런 구상이 합당하다면 북한이 먼저 할 일은 오바마 정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스티븐 보즈워스를 평양으로 불러 북·미 대화의 수준·일정·의제를 논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보즈워스의 평양 방문을 거절하고 있다.

북한의 색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불편했던 한·미 관계와 이명박 정부의 돈독한 한·미 관계의 차이를 못 보는 데서도 드러난다. 오바마의 이명박 신뢰는 깊다. 미국이 북한과 어떤 의제, 어떤 수준의 협상을 해도 한국과의 협의를 건너뛰는 일은 없을 것이다. 2002년 10월 국무차관보가 평양에 가서 고농축 우라늄 방식 핵무기 개발 계획에 관한 정보라는 걸 읽고 2차 핵위기를 촉발한 것 같은 일방주의는 없을 것이다. 통미봉남은 시사용어 박물관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남북 대화가 북·미 대화의 최소한의 촉진제임을 알아야 한다.

오바마는 쿠바·이란·시리아뿐 아니라 심지어 알카에다와도 대화를 하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이 북한을 예외취급한다면 그건 북한이 자초한 것이다. 체질적으로 아시아에 호감을 가진 미국 대통령을 만난 게 북한엔 기회다. 북한은 핵·미사일 협박의 깃발을 든 바보들의 행진을 중단하라. 남북 당국 간 대화를 재개하라. 보즈워스를 초청하라. 6자회담에 복귀하라. 한국도 북한의 그런 선택을 도우라. 북한의 바보들의 행진의 종착역은 핵·미사일 추가실험일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스스로 쏟아낸 발언에 휩쓸려 다시 핵·미사일 실험을 하면 북핵 문제는 수습불능 수준으로 후퇴할 것이다. PSI(대량파괴무기 방지구상) 참여 보류가 북한의 합리적인 선택을 돕는 사례다. 미국도 적당한 수준의 당근으로 북한에 퇴로를 열어주어야 한다.

김영희 국제문제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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