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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 아시아] 석유 수송로 말라카 해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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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지난해 3월 26일 말라카 해협. 인도네시아 국적 5만t급 화물선으로 작고 날렵한 배 한척이 조용히 접근했다. 화물선의 선원들은 멀뚱하게 배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 돌연 무장 괴한 10여명이 총성을 울리며 번개같이 화물선으로 올라탔다.

◇해적인가 테러인가=이들은 조타실을 점거한 뒤 한시간 동안 항해사.항법사.통신사에게 운항기술.통신시스템 등을 익혔다. 직접 키를 잡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이의 좁은 해협을 따라 배를 운항해 보기도 했다. 괴한들은 선장과 1등 항해사를 납치해 사라졌다. 배 안의 돈과 귀중품에는 손도 대지 않았고, 인질 석방을 대가로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사건 보고를 받은 미국 국방부와 중앙정보국(CIA)은 바짝 긴장했다. 테러리스트가 장악한 화물선이 항구나 유조선으로 돌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알카에다 요원들은 미국 플로리다 항공학교에서 비행 기술을 배운 뒤 여객기를 조종해 뉴욕의 세계무역센터(WTC)로 돌진했다.

◇"말라카는 테러 최적지"=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지난달 초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안보회의에서 "미군이 동남아의 테러 진압에 참여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토머스 파고 미 태평양 사령관은 지난 3월 "말라카 해협의 안전을 위해 동남아 국가들과 해상보안 정보를 교환하고 합동순시활동을 상설화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미국은 제마 이슬라미야 등 동남아 지역 내 알카에다 연계 조직들이 해적을 앞세워 대형 테러를 기획할 수 있다는 점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호주와 싱가포르는 미국의 제안에 적극 찬성이다. 호주는 지난 3월 "세계 석유 물동량의 50%, 화물 운송량의 25%가 통과하는 말라카 해협은 테러 공격의 표적이 될 우려가 크다"며 말라카 해협 주변국가들이 공동 순시활동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토니 탄 켄 얌 싱가포르 부총리는 "테러집단이 선박을 나포하거나 침몰시켜 해협의 흐름을 막을 수 있다"면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유조선 또는 LNG선을 폭파해 해협이 불바다로 변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시아타임스(AT)는 테러전문가들의 말을 인용, "해적들이 해낼 수 있는 범죄라면 전문 테러리스트에겐 일도 아니다. 테러 집단이 말라카 해협을 '재앙의 바다'로 만들 가능성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파이낸셜타임스도 "폭이 2.4㎞밖에 안 되는 말라카 해협은 테러에 취약한 구조"라며 대형참사를 경고했다.

◇"자체 순시 가능"=압둘라 아마드 바다위 말레이시아 총리는 미국의 제안 직후인 지난달 초 "우리 영해는 우리가 지킨다"며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다. 인도네시아 해군 참모총장 베르나르드 켄트 손닥도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행위가 적발되면 누구라도 즉결 처형할 것"이라며 "주변국들과 손잡으면 해적 소탕은 문제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이 해적 창궐에 시달리면서도 미국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자국 내 이슬람 세력들의 반발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미군의 등장이 테러 활동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걱정거리다.

하지만 두 국가의 해군력이 역부족이라는 게 문제다. 영국계 군사정보연구소는 "인도네시아의 경우 2004년 현재 함정 117척, 순시선 57척, 지원선 44척 수준에 불과하다"며 "이 정도로는 1만7000개 섬 가운데 30% 정도만 경비할 수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타협 가능성은 있다=국제사회의 압력이 거세지자 최근 말레이시아의 태도가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나지브 라자크 국방장관은 "명백한 반(反) 테러.해적소통 작전에 한해 미군과 해상합동훈련을 할 수 있다"며 한발 물러섰다. AT는 "말레이시아는 지난해 테러전문센터를 세우는 등 미국과 공조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동남아 해적 실태=국제해사국(IMB)은 올 1월부터 3개월간 발생한 79건의 해적 피해 가운데 21건이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특히 말라카 해협에선 지난해(3건)보다 두배 이상으로 늘어난 8건이 보고됐다. 연도별로 보면 2002년 말라카 해역에서 발생한 해적 행위는 21건, 2003년엔 30건이다.

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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