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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해낸다]10.<끝> 우리식 '감동' 을 팔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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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재즈 뮤지션 이정식 (李廷植.37) .그는 외래음악을 우리식으로 소화해 본고장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무대에 한국 토종의 영혼이 살아 숨쉬게 함으로써 '가슴으로 연주하는 음악가' 로 인정받은 것이다.

지난해 11월 음반 발매계약을 싸고 세계적 재즈 레이블을 가진 EMI와 폴리그램이 경쟁을 벌였을 정도. 김덕수 (金德洙.46) 사물놀이패. 이정식이 외국문화를 주체적으로 흡수했다면 그들은 한국의 전통소리를 국제적 문화상품으로 부각시켰다.

처음 세계의 문을 두드렸던 15년 전은 우리 고유음악에 대한 서양인들의 이해가 전무한 시기였다.

지금은 한해 평균 1백~1백50일의 해외공연이 이어지고 있다면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연간 6억~7억원. 독창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서양인의 기호에 맞는 타악적 앙상블을 구현했다는 평가다.

IMF 한파는 문화쪽에도 거세다.

21세기를 문화의 시대로 일구겠다는 국민적 자신감이 흔들리면서 문화계가 깊은 '동면 (冬眠)' 에 빠져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 보인다.

하지만 위기를 새 출발의 계기로 삼자는 자성론도 일고 있다.

이 기회에 서구식 사고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던 관행을 깨고 우리 것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반성을 앞세우면서 우리식 (式) '감동' 을 세계상품화하자는 것이다.

국제경쟁력이란 남이 흉내낼 수 없는 '감동' 을 토대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그간 해외에서 고군분투 (孤軍奮鬪) 하며 올린 성가들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음악 외에도 화단 (畵壇) 의 경우를 보자. 서양화가 고영훈 (高榮勳.46) .한국인 특유의 공교한 손놀림으로 고서 (古書).쟁기.돌멩이 등 일상사물을 극사실 기법으로 재현해 국제적인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지난 6년여간 외국에다 판 작품은 60만달러 (약 11억원) 규모. 서구인들이 따라오지 못할 그의 붓터치 역시 '한국적 색깔' 임에 분명하다.

한국화 분야의 박대성 (朴大成.53) 도 그렇다.

프랑스 파리에서 오는 17일까지 이어질 전시회에서 그는 한국문화의 국제적 접목이란 화두의 모범을 보여준다.

전통 산수화의 소재와 기법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자연이나 사물의 특정 부분을 클로즈업하는 현대적 분위기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작품 2점에 대해 임자가 나타났는데 가격은 1점에 25만프랑 (약 7천5백만원) . 문학의 해외 진출도 90년대 중반 이후 부쩍 활기차다.

문예진흥원.대산재단 등이 제작.번역비 일부를 지원한 우리 작품의 해외 번역집은 97년말 현재 4백57종.아직 이렇다할 수익은 없으나 번역의 질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한국문화의 해외보급에 전초역을 맡을 전망이다.

책 하면 수입을 먼저 연상케 하는 출판계. 여기에 부는 바람도 여간 새롭지 않다.

시공사가 일본으로부터 일어판 '고려불화' (40만원) 1천여부를 예약주문받은 것이 대표적인 예. 보림.한국프뢰벨 등 아동물 전문출판사의 그림책 수출도 최근 크게 느는 추세다.

생활문화 분야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개량한복.김치.한과.침구 등 전통 의식주 문화 모두 수출상품 개발 열기에 휩싸여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런 양상은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

특히 디자인 분야를 놓고서 이런 지적들이 많다.

해외시장에서 우리 공산품이 '헐값' 인 것은 한국적 혼 (魂) 이 빠져버린 외형 때문. 제품의 경쟁력은 문화 정체성에서 비롯한다고 보는 서울대 김민수 (金玟秀.산업디자인) 교수는 글로벌 시대 전략으로 '우리의 독특한 정서와 상상력의 상품화' 를 주문한다.

이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문화상품화 전략을 써야 할 때다.

그것도 거국적인 전략 구사여야 한다.

선진국들은 출발선을 떠난 지 오래다.

특히 영화.만화.애니메이션.컴퓨터 소프트웨어 등 영상.멀티미디어쪽의 전략 상품화에 더 매진해야 할 상황이다 . 박물관.미술관에 깊이 간직된 소장품들의 세계상품화까지도 해내야 한다.

프랑스 정부는 국립박물관 전시품 중 4만여종을 소품화 (小品化) 해 관광상품으로 팔고 있다.

이어령 (李御寧) 이화여대 석학교수의 진단을 옮기면서 글을 맺자. "IMF난국은 단순히 경제의 어려움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전통의 재해석을 통해 우리와 세계가 함께 누리는 문화의 개념을 새로 정립해야 근본적인 위기극복이 가능하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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