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여당 민원실장은 검찰총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최근 검사들 사이에는 대선 직후 검찰 요로 (要路)에 전화를 걸어 “선거과정에서 편파수사가 많았는데 앞으로 잘하라” 며 압력을 넣었다는 국민회의 한 당직자의 행동을 둘러싸고 말들이 무성하다.

내용은 이렇다.

국민회의 오길록 (吳佶錄) 민원실장은 김대중 (金大中)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지난해 12월19일부터 검사장.부장검사.검사를 막론하고 대선관련 고소.고발사건을 수사 또는 지휘하고 있는 검찰 관계자 5~6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吳씨는 “검찰의 선거사범 수사태도에 유감이 많다.

국민회의가 고발한 사건을 빨리 처리하라” 고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吳씨는 자신의 신분을 '집권당 민원실장' 이라고 밝힌 뒤 “○○○를 빨리 출국금지시키라” 며 사실상 수사지휘 (?) 성격의 요구를 했고 검사들이 고분고분하지 않자 심지어 “ (살생부) 리스트에 오르고 싶으냐” 는 말도 내뱉었다는 것이 전화를 받은 당사자들의 주장이다.

吳씨는 이에 대해 “검찰이 국민회의가 고발한 한나라당 관련인사에 대해선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국민회의 당원들에 대해서만 신속한 수사를 벌여 공정한 수사를 촉구했을 뿐” 이라고 해명했다.

이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吳씨의 행동은 스스로의 표현처럼 '집권당' 당직자로서 상식과 금도 (襟度) 를 벗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이제 검찰의 선거사범 조사가 시작된 마당에 '편파수사' 운운하는 것도 맞지 않지만 만약 검찰수사에 문제가 있다면 중앙당 차원의 공식 루트를 통해 항의하는 게 옳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吳씨의 행동은 “집권당 당직자가 된 나를 몰라보느냐” 는 식의 유치한 과시욕 표현으로 해석되고 있다.

일부 검사들은 “얼마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람들이 개인 의견을 마치 차기정부의 정책인 것처럼 발표해 당선자를 곤혹스럽게 하더니 이제 중앙당 당직자도 그 행렬에 가세한 모양” 이라고 吳씨의 돌출행동을 꼬집고 있다.

이제 국민들은 검찰이 특정 정치집단에 편파적으로 검찰권을 행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다.

검찰이 지난해 한보 특혜대출사건을 어물쩍 수사하고 넘어가려다 결국 빗발치는 여론에 항복해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의 차남 현철 (賢哲) 씨를 구속한 것이 좋은 본보기다.

김대중 당선자가 모든 정치세력과 국민을 상대로 화합과 동참을 호소하는 시점에 '살생부' 운운하는 것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를 吳씨 스스로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김정욱<사회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