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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한국엔 경제전문가 없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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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즘에는 너무 비관적인 분위기가 우세해 어디를 가도 '한국의 입장' 이나 '자존심' 과 같은 말을 꺼내기가 머쓱하다.

그래도 우리의 장래 운명을 놓고 외국인들끼리 갑론을박 (甲論乙駁) 하는 것을, 그것도 외국 언론을 통해 전달받는 것은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다 (월스트리트 저널 1월5일자 오피니언난을 보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도대체 쟁쟁하던 우리의 천하재사 (天下才士) 들은 다 어디에 갔는가.

왜 우리 국민은 우리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해결책을 듣지 못하고 다른 나라 학자의 매사에 콩 놔라 팥 놔라 하는 소리를 듣는지 모를 일이다.

매일 TV에 나와 떠드는 전문가를 보거나 신문 기고문을 읽어봐도 고작 충실히 국제통화기금 (IMF) 요구에 순응하자, 혹은 절약하자는 수준을 넘지 못한다.

왜 우리 전문가는 미국의 제프리 삭스나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의 마틴 울프처럼 대놓고 IMF의 '한국 처방' 에 문제가 있다는 글을 못 쓰는지 의문이다.

그런 기고문이 게재되면 혹시나 IMF를 화나게 해 지원에 차질이 오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일까. 또 우리 언론은 왜 뉴욕 타임스처럼 IMF 처방이 지나치게 가혹하고 그같은 경직적인 요구 때문에 한국이 수십년간 빚더미에 파묻힐지도 모른다는 문제를 지적하지 못 하는지 반성의 여지가 있다.

IMF협약 이행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빚진 죄인 신드롬' 에선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독일의 저명한 언론인 테오 좀머는 중앙일보 기고문에서 지나치게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다고 충고하고 있다.

우리가 제때에 개혁하지 못하고 방만하게 경영을 하고 불투명한 회계 때문에 국제적인 신뢰도를 잃어버렸다면 문제를 시정하려는 노력도 가급적 우리 스스로가 방향을 잡고 추진하자는 얘기다.

따지고 보면 무책임하게, 때로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영업한 종금사의 경우를 보면 외국에 대해 할 말이 없지만 '한국은 봉' 이라고 여기고 마구 돈을 꿔준 외국 금융기관도 전혀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미국의 여론중에는 한국의 부실종금사가 파산하고 돈을 꿔준 외국 금융기관도 그 책임을 같이 져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그것이 오히려 시장원리에 맞는 것이지 IMF식의 지원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사태 초기에 부실종금사의 파산을 실천에 옮겼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늘 그랬듯이 기업에 미치는 부작용 때문에 망설이다 스스로 손발을 묶었다.

IMF 처방전이 대체로 맞는 방향이고 벌써 우리가 고쳤어야 할 것이었다는 데는 여론이 공감하는 듯하다.

그러나 최소한 한가지 부분에서는 IMF와 추가협의를 해야 한다.

그것은 통화공급을 지나치게 경직적으로 운용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최소한 통화의 유통속도가 정상화될 때까지 지나친 긴축은 문제가 심각하다.

이와 관련해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12월20일자 권두기고를 통해 디플레와 공황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1930년 미국 대공황의 경험을 상기시키면서 이번 한국 금융위기도 잘못된 정책으로 대응하면 똑같은 실수, 즉 급속한 디플레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코노미스트는 틀린 정책의 예로 외국에 문호를 폐쇄하는 보호주의, 자본이동의 억제, 은행 도산의 무시, 외국인 비난 및 통화공급의 지나친 긴축을 꼽았다.

대선 (大選) 전 한때 '재협상' 이 정치 이슈화한 적이 있다.

이제는 정치적인 차원이 아니라 순수하게 경제적인 의미에서 한국의 경제전문가들이 왜 추가협의가 필요한지에 대한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

IMF와 약속한 이행조건과는 별도로 전문가들이 시나리오별로 과학적인 근거에 입각해 우리에게 필요한 정책대안을 내야지 이제 와서 문제를 처음 안 것처럼 IMF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뇌서야 되겠는가.

학계나 연구기관의 전문가 실종에서 느끼는 답답함은 기업의 전문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세계가 좁다 하고 끝없이 뻗을 것처럼 자신하던 경영전문가들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쉬운 해결책인 제살 깎기에만 열중이다.

'인사 (人事) 철' 을 맞아 권문세가에 기웃거리지 말고 전문가 집단의 자긍심과 전문성이 돋보여야 할 때다.

장현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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