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금지업종제도 폐지…경영책임도 은행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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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금융 당국이 여신금지 업종을 전면 폐지키로 방침을 정한 것은 더 이상 금융산업에 불필요한 '족쇄' 를 채워둘 명분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제일.서울은행이 다음달중 외국계 은행에 넘어갈 것으로 예상되고 올해 안에 은행업이 완전 개방되는 상황에서 자칫하면 이 제도가 국내 금융기관에 '역차별' 적 장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누구에게 돈을 빌려주든, 또 빌려준 돈을 떼이든 말든 이는 전적으로 해당 금융기관이 알아서 할 일이다.

또 금융규제 완화 차원에서도 여신금지 업종 제도와 같이 자유로운 경쟁을 제한하는 제도는 폐지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게 금융계의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IMF로부터 지원받는 대가로 금융시장의 빗장을 당초 예정보다 앞당겨 풀어야 할 처지여서 국제관행과 동떨어진 제도를 하루빨리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터였다.

물론 정부가 부동산업.유흥업.도박업 등을 여신금지 업종으로 묶은 것은 한정된 금융자금을 제조업체에 우선적으로 돌리기 위한 고육지책 (苦肉之策) 적 성격이 강했다.

예컨대 부동산 투기가 전국을 휩쓸던 80년대 후반이나 90년대 초에는 부동산 투기 억제가 최우선 과제여서 은행 돈을 빌려 부동산을 사들이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특히 만성적인 자금 초과수요 상황에서 제조업체들도 돈을 못구해 쩔쩔매는 마당에 은행 돈이 불건전하고 사치스런 업종에 흐르도록 놔둘 수는 없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제도의 폐해도 적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금융기관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제도인데다 대상 선정 과정에서도 무리수가 생기곤 했다.

예컨대 여관업의 경우 방이 20개 이상 (甲등급) 이면 여신금지 업종으로 묶여 은행 돈을 빌릴 수 없는 반면 그보다 작으면 (乙등급) 은행 대출이 가능했던 적도 있었다.

경주.부여 등 관광지에 수학여행가면 묵을 여관이 넉넉지 않아 은행 돈으로 여관을 늘리고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만들도록 할 필요가 제기돼도 이를 제도적으로 막아왔던 것이다.

또 지난해 1월까지는 사회간접자본 (SOC) 확충을 위해 토지를 매입할 때도 은행 돈을 빌릴 수 없었다.

이런 부작용을 감안해 정부는 그동안 여러차례 여신금지 업종을 풀어왔으며 현재 부동산업 등 9개 업종만 남아있다.

하지만 지금도 서민주택 건설용 토지.실수요자의 농지.학교법인 교지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한 토지매입과 대형주택.오피스텔.콘도미니엄의 건설 및 매입은 여신금지 부문으로 남아있다.

부동산 부문에는 은행 돈이 흘러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것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기업이 줄줄이 초상인데 은행에서 부동산 매입 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해온 한은도 새로운 상황 아래에서 방향을 고쳐잡았다.

어쨌든 여신금지 업종 제도가 도입 24년만에 완전 폐지되는 것을 기폭제로 국제기준에 맞지 않는 각종 금융규제는 대부분 철폐될 것으로 보인다.

박의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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