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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을 때 좌절, 키 큰 뒤 힘이 됐어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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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호 14면

“언니(또는 친구) 따라 갔다가 운동을 시작하게 됐어요.” “키가 크다고 선생님이 운동을 권유했어요.” 스포츠 스타들에게 운동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물으면 으레 나오는 대답이다. ‘피겨 퀸’ 김연아(고려대)는 언니 어깨 너머로 스케이트를 배웠고, 대부분의 배구·농구 선수들은 ‘키가 크다’는 이유로 운동을 시작했다. 김연경(21·흥국생명사진)의 스토리 라인도 출발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배구 선수였던 언니를 따라 공을 잡았다. 또래보다 조금 더 키가 크다는 이유도 빠질 수 없다. 그의 스토리는 이처럼 진부하게 시작하지만 그 전개와 절정을 향해 가는 과정은 범상치 않다. 물론 대부분의 스토리가 성공 대목에서는 범상치 않긴 하지만.

수비도 잘하는 공격수, 김연경

#챔프전 MVP
김연경은 11일 막을 내린 2008~2009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 챔피언결정전에서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의 챔프전 득점(93점)은 데라크루즈(124점·GS칼텍스), 카리나(106점·흥국생명)에게 뒤진 3위지만 공격 성공률은 52.60%로 1위다. 득점은 공격 기회가 많으면 높을 수밖에 없다. 공격수의 척도는 성공률이다. 서브에이스(세트당 0.44개)는 1위 데라크루즈(0.50개)에게 뒤졌다. 그런 그가 정말 무서운 건 수비 때문이다.

그는 서브리시브(세트당 4.31개)와 상대 공격을 받아내는 디그(세트당 4.44개)에서 1위다. 국가대표 리베로 남지연(GS칼텍스)도, 같은 팀 리베로 조상희도 그의 발밑에 있다. 국내 최장신(1m92㎝) 여자 선수인 그가 수비 1위를 하는 것. 2m22㎝의 농구 선수 하승진(KCC)이 어시스트와 가로채기 1위를 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 김연경은 최우수선수(MVP)가 됐다. 데뷔 첫 시즌인 2005~2006시즌 이후 이번까지 8번의 MVP(정규리그·챔프전) 중 6번을 쓸어갔다. 팀의 에이스는 공격만 하느라 수비는 젬병인 경우가 많다. 그는 어떻게 공수를 겸비하게 됐나.

#전화위복
초등학교(안산서초) 4학년 때 김연경의 키는 1m48㎝. 또래에 비해 좀 큰 편이었지만 배구 선수로서 큰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시작은 세터였다. 5학년에 올라갔는데도 키는 좀처럼 자라지 않았고 그의 더딘 성장은 중학교(원곡중) 때까지 이어졌다. 그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갔을 때 그의 학교에 김재영(현대건설)이 입학했다.

그는 주전 세터 경쟁에서 1년 후배 김재영에게 밀렸다. 배구를 계속하기 위해 새로운 포지션을 찾아 공격을 시작했다. 정작 팀에서 쓰임새는 공격보다 수비 쪽이었다.

주전 공격수가 후위로 빠지면 수비를 하러 투입되는 교체선수. 마음속으로는 억울했지만 그의 근육 속에는 탄탄한 수비력이 녹아 들어갔다. 어린 중학생이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전 당시 배구로는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누굴 닮아야지’라는 생각도 못 했고요.” 당시 원곡중에는 남자축구팀이 있었다. 그는 축구팀을 보며 ‘확 축구나 해 버릴까’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3학년이 된 그는 김동열 원곡중 감독을 찾아가 “주전층이 엷은 서문여고로 보내 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김 감독은 “넌 손발이 커서 언젠가는 꼭 키가 클 것”이라며 여고 배구 명문 한일전산여고로 보냈다. 김 감독 말처럼 고등학교 때부터 주체할 수 없이 자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1m74㎝였던 키가 2학년 때는 1m82㎝였고 3학년 때는 1m86㎝까지 자랐다. 그는 여전히 자란다. 올해 새로 잰 키가 1m92㎝. 그의 성장판은 아직도 닫히지 않았다고 한다.

#외강내유
2007년 2월 21일. 김연경은 풀세트 접전이 펼쳐진 도로공사와 이날 경기 5세트 14-14에서 공격을 성공시켰다. 그런데 주심이 중앙선 침범 범실을 불어 도로공사의 점수를 인정했다. 강하게 항의하던 김연경의 입에서 ‘매우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승부욕이 강한 그는 평소에도 마음대로 경기가 풀리지 않거나 자신의 생각과 다른 판정이 나오면 다소 거친 반응을 보인다. 그만큼 코트에서 그 누구보다 ‘파이팅’이 넘치는 그다. 하지만 어느 선수보다 많이 웃고 많이 장난친다. 가요 신곡이 나오면 안무를 외워 뒀다가 경기 중 세리머니로 한다.

코트 밖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별명인 ‘연냄이’도 남자 같다고 해서 붙은 ‘연남(연경+남자)이’가 변한 것이다. 발이 클 뿐만 아니라 넓다. “다른 종목의 친한 친구 이름 좀 대보라”니까 거침없이 나온다. “여자축구 선수로 박희영(대교), 김주희(현대제철)가 있고요, 골프에는 최나연(SK텔레콤), 지은희(휠라코리아), 김하늘(코오롱)이 친해요. 여자농구 신정자(금호생명)도 있고요.” 내친김에 “남자도 불러 보라”고 했다.

“배구선수 중에 황동일(LIG손해보험), 장광균, 강동진(이상 대한항공)이 있고요. 연예인 중에는 이휘재요.” 연예인과 친하면 그 주변 연예인도 알기 마련이다. “다른 연예인은 없는지” 묻자 “이휘재한테 ‘혼자만 나오지 말고 다른 연예인 좀 데리고 오라’ 했더니 뭐라는지 아세요. ‘지상렬·정준하 어때’ 그러는 거예요. 놔두랬어요.” 여기까지 들으면 활달한 O형(혈액형) 같다. 사실 그는 AB형이다.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서지 못한다. 스스로 “누군가 먼저 나서서 소개해 줘야 인사를 트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요즘은 “보이시하다”는 말도 거슬린다. “예쁘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좋다. 화장도 좋아하고 피부 관리를 위해 일주일에 서너 번은 팩도 한다. 그러면 지금껏 우리가 봤던 김연경은 뭔가. 해외 진출 얘기를 하면서 좀 더 알게 됐다.

#해외진출
프로배구 원년(2005시즌) 여자부 최하위에 그쳤던 흥국생명은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김연경을 잡았다. 당시 그의 나이 17세. 그의 입단과 함께 흥국생명은 두 시즌 연속 통합 챔프가 됐다.

그 첫해 김연경은 신인상과 MVP를 휩쓸었고 다음 해도 MVP는 그의 차지였다. 당시 다른 구단 관계자들은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김연경이 있는 한 다른 팀은 우승하기가 불가능하다. 뻔한 승부가 되면 인기는 추락한다. 김연경을 외국으로 보내야 한다.” 김연경 본인도 구단에 해외진출 얘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던 구단이 이번 시즌 직전 “시즌이 끝난 뒤 해외진출을 추진하자”고 입장을 바꿨다.

그가 해외진출을 원했던 이유는 소박했다. “대표팀의 해외경기를 나가 보면 외국 선수들은 다른 나라 선수들과 친하게 아는 척하고 그러는데 부러웠어요. 외국 생활도 해 보고 싶고.” 하지만 본격적으로 일이 추진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독일에 진출한 문성민(프리드리히스하펜)이 언어·음식 등의 문제로 고전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솔직히 기대보다 두려움이 커요. 가끔은 ‘안 가면 어떨까’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흔들리는 그의 마음과 달리 그를 해외에 보내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겠다는 구단 입장은 강력하다. 김현도 흥국생명 사무국장은 “우리도 (김)연경이가 빠지면 팀 전력이 확 떨어지는 걸 안다. 하지만 연경이를 위해서는 큰 경험이 필요하다”고 못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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