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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마약 주무르던 ‘바닥의 왕자’ 특급호텔 ‘요리의 제왕’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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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제프 헨더슨은 교도소에서 꿈을 찾은 뒤 자신이 가장 간절하게 원한 것은 ‘배움’이었다고 말한다. 요리를 배우면서 책과 신문을 읽기 시작했고, 좀더 수준 높은 요리를 배우기 위해 최고의 인물을 찾아다녔다. 작은 사진은 죄수 시절의 제프 헨더슨. 노블마인 제공

나는 희망이다
제프 헨더슨 지음, 나선숙 옮김
노블마인, 392쪽, 1만2000원

“헨더슨씨, 사람을 죽인 적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면접하면서 ‘사람 죽여본 적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그런데 이 책의 주인공은 요리사가 되기 위해 직장을 구할 때마다 그런 질문을 받아야 했던 사람이다. 이렇게 과격한 질문을 받으면서 그는 수치심을 느끼기보다는 차라리 고마워 했다. 주방에서 일할 수만 있게 해준다면 그는 뭐든 닥치는대로 다 할 각오가 돼 있었다. 화장실 청소든, 부엌 바닥 청소든, 설거지든 가릴 것도 없었다. 그에게 지난 10년 간의 감옥생활보다 더 무거운 것은 ‘전과자’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딱지였다. 그리고 어쩌면 하고 싶은 일을 끝내 해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흑인에 마약사범으로 235개월(19년 7개월)형을 선고받은 죄수에서 미국에서 손꼽는 요리사가 된 사람, 이 책을 쓴 제프 헨더슨(45)이 그 주인공이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니 한마디로 ‘바닥의 왕자’다. 마약, 범죄가 일상인 LA의 가난한 흑인 동네 사우스센트럴에서 자라면서 온몸으로 ‘밑바닥’ 생활을 체험했다. 스물 넷이란 나이에 죄수복을 입고 더는 앞날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난 끝났어”라며 흐느낄때, 그보다 더한 절망의 ‘바닥’은 없었다. 그런데 그 바닥이 그를 다시 살렸다. 교도소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게 되면서 ‘요리사’란 자신의 꿈을 찾고 키운 것이다. 삶이란 정말이지 그 ‘바닥’에 도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법인가 보다.

제프 헨더슨의 어린 시절 대목을 읽다 보면 ‘후레자식’이란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부모는 일찍이 헤어졌고, 할아버지가 틈틈이 도둑질을 가르쳤다는 것, 즉 환경이 그랬다는 걸 감안해도 그렇다. 예닐곱 살 때부터 도둑질을 시작해 별명이 ‘손버릇 나쁜 제프리’였다. 열세 살엔 이미 “잔뼈가 굵은 좀도둑”이었고, 결국 손버릇 문제로 열네 살 때 학교를 영원히 떠나야 했다. 열다섯 살 때부터 여자애들과 자기 시작했고, 마약판매에 발을 들이고, 멋도 모르고 아빠가 된 것이 열 일곱 살 때였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기는 커녕 “훨씬 똑똑한 도둑이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스무 살 무렵, ‘크랙’(마약의 일종)을 직접 조제해 팔며 사업을 확장한 그는 일주일에 3만5000달러(약 5000만원)를 버는 샌디에이고 최고의 마약 딜러가 돼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 풀리던” 삶은 몇 년간 그를 추적해온 경찰에 체포되면서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마당쓸기를 소홀히해 설거지부로 쫓겨난 것이 인생 일대의 전환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주방에서 보낸 시간은 내게 목표를 주었다. 처음으로 이 인생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알게 되었다.” 교도소에서 처음으로 책을 읽었고, 미 최고의 흑인 요리사들을 소개한 신문( ‘USA투데이’)를 읽고 잠 못 이뤘다. 기사에 소개된 요리사중 로버트 개즈비는 그가 감형받아 10년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후에 그의 인생을 이끄는 최고의 ‘멘토’가 된다.

책의 후반부는 요리사가 쓴 ‘자기계발서’면서 매혹적인 요리의 세계를 상세히 기술한 ‘요리책’과도 같다. 또 세계 최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 세계를 풍부하게 소개한 ‘키친 서바이벌 리포트’로도 읽힌다. 헨더슨은 요리사가 되기 위해서 얼마만한 수모를 견딜 수 있는지를, 어떤 잡일도 할 수 있는지를, 어떻게 새벽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자신의 멘토가 될 만한 사람을 찾아내고 그를 어떻게 감동시켜 설거지라도 시키게 했는지를 그의 ‘몸부림’으로 보여준다. 그는 간절히 원했고 집요하게 매달렸다.

헨더슨은 2001년 미 ‘테이스팅협회’ 선정 그해의 ‘최고 요리사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 호텔’ 최초의 흑인 총주방장이 됐다. 2007년 이 책이 출간된 후 그는 ‘오프라 윈프리쇼’ 등에 출연하면서 전국적인 스타가 됐다. 그의 인생역전 스토리는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현재 그는 TV 리얼리티 쇼 ‘세프 제프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틈틈이 학교와 교도소 등에서 강연하고 있다.

책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멘토 개즈비의 주옥같은 가르침이다. 헨더슨은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했다. 그가 ‘흑인 파티쉐’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개즈비는 이렇게 말했다. “제프, 요리 업계에서는 흑인인지 백인인지 라티노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재능이야. 정열이 중요해. 흑인 어쩌고 하는 시시껄렁한 생각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게 좋아.” 자신의 취약점을 ‘방패’ 삼아 쉽게 포기하고 주저앉지 말라는 경고였다. 원제 『Cooked』.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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