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알제리,하씨 메싸우드'(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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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그는 내게 열쇠를 맡긴 채 비틀거리며 화장실을 간다고 일어섰다.

테이블이 흔들리며 맥주병과 유리잔이 쓰러졌다.

마브루카가 일어나 그를 부축했다.

나는 이므나우가 귀찮다는 듯 병과 잔을 다시 세워놓는 걸 보며 오른손으로 열쇠를 꼭 쥐었다. 부장과 나는 취해 있었다.

근 여섯 시간 동안 술만 마셔댄 탓이었다.

나는 주체할 길 없이 내 안으로 밀려드는 감정의 소요에 맥없이 두 손을 놓고 있었다.

내일이면 서울로 떠난다는 생각에 나는 왠지 조급해졌다.

마치 빠른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혼자 빈 잔에 술을 따라 연거푸 마셔대고 있었다.

이므나우는 멀뚱히 보고만 있다 나를 따라 천천히 입가에 술잔을 대었다.

사막같이, 권태롭고 낯선 얼굴이었다.

뻣뻣이 일어선 그녀의 갈색 머리칼을 보며 나는 문득 내가 봤던 파란 지중해를 머리 속에 떠올렸다.

- 이봐, 자네도 들어서 알겠지만, 내가 원래 이런 놈은 아니야. 난 시추 현장에서 이십 년을 굴러먹었어. 베테랑이라구. 자네도 듣는 귀가 있으면 회사에서 내 평판이 어떻다는 걸 조금은 알 거 아냐. 난 원래 이런 놈이 아니야. 하지만, 이런 곳은 처음이야. 사막엔, 사막엔, 못 당하겠어. 정말 지긋지긋하다구. 그래 자네 같은 사람은 몰라. 당신은 몰라. 당신같이 사막이 체질인 사람은 모를 거야…… 아마 영원히. 나는 그의 눈가가 슬픔으로 촉촉이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화장실에 다녀온 그는 다짜고짜 나를 벽에 밀어붙인 뒤 멱살을 잡고 물기어린 목소리로 내게 호소하고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그는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술기운으로 혼곤한 머리를 흔들며 들쩍지근해진 목구멍으로 침을 삼켰다.

나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브루카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부장의 팔을 한동안 붙들고 있었고 나는 떨리는 입술을 뗄 듯 말 듯하고 있었다.

부장이 갑자기 풀이 죽어 잡고 있던 멱살을 슬며시 풀었다.

내 눈길을 피한 채 그는 등을 돌리곤 마브루카의 어깨를 오른팔로 감았다.

몸을 꼭 붙인 그들은 이층으로 향한 계단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브루카는 부장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돌려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밝은 얼굴로 윙크를 했다.

부장이 꺼내 보여줬던 사진 속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부장은 애써 나를 외면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이 다시 부장의 품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천천히 멀어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허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바닷물이 빠져나간 황량한 갯벌이나 사막, 바람 한점 없는 모래 사막을 볼 때 느끼던 그런 감정이었다.

그래,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런지 모른다.

나는 뜻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계산은 부장이 다 치렀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샤워도 하지 않은 채 이므나우의 옷을 사정없이 벗겼다.

그리곤 섹스를 했다.

그녀는 아무 표정 없이 내가 내미는 거친 손길에 순순히 응했다.

나는 식물 같은 그녀의 표정이, 사막 같은 그녀의 회색 몸뚱아리가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능멸로 짓밟혀지는 것을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숨이 막혀 나에게 애원하고 빌고 자책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나는 하반신을 세차게 움직였다.

구석에 몰린 그녀의 머리가 침대의 모서리에 반복적으로 부딪히고 있었다.

그녀가 뭐라고 지껄였다.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나의 왼뺨을 후려쳤다.

이어 머리맡에 있던 재떨이로 내 왼쪽 관자놀이를 쳤다.

나는 화끈하는 뜨거움에 한쪽 머리를 부여잡고 모로 쓰러졌다.

그녀가 침대에서 튕겨 일어나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그녀의 손엔 어디서 났는지 칼이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반사광에 번쩍거리는, 섬뜩한 칼날을 내게로 향한 채 왼쪽 귀에서 어깨까지 피를 흘리며 알몸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거웃 근처가 빨갰다.

그녀는 악에 받쳐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미친 듯이 떠들어댔다.

나는 피가 흐르고 있는 머리 한쪽을 부여잡고 침대 뒤로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여태도 빳빳한 성기가 다리 사이에서 거추장스럽게 흔들거렸고 가슴은 터질 듯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는 제 옷을 수습한 뒤 방문을 열곤 나에게 마지막으로 일갈을 던진 뒤 칼을 바닥에다 내동댕이 쳤다.

문 소리가 난 뒤 한참 후에야 나는 머리 부근의 출혈이 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세면대로 가서 일단 상처를 깨끗한 물로 닦아내고 선반에 있던 응급상자에서 붕대를 꺼내 상처를 동여맸다.

그리곤 세수를 했다.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아 문득 고개를 드니 전면에 있던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그렇게 한동안 거울을 쳐다보고 있었다.

거울속에 비친 내 얼굴을. 나는 내가 어느새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위가 조용해지고 얼굴의 물기가 마르자 가슴 속에 있던 흐느낌이 들려왔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내 양볼과 콧등, 인중 위로 소리없이 흘러 내렸다.

그리곤 콧등이 시큰하더니 내 얼굴 표정이 구겨지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설움에 복받쳐 나는 침을 삼키며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울고 있는 내 모습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비행장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이므나우가 남겨둔 담배를 한 대 피워물었다.

그녀가 나간 뒤 침대가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루피가 내게 줬던, 알제리인이라면 누구나가 피우는 필터가 짧은 그 담배였다.

나는 붕대로 감싸인 머리를 만져보았다.

상처는 가벼운 두통처럼 아직 남아 있었다.

그때 부장이 건물 현관에 나타났다.

나는 괜한 설레임에 그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내가 다가가자 부장은 시무룩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 어쩌면 여기 다시 오게 될지도 모르겠어. 벌써 컨소시엄이 이 기까지 잡아놓고 시추 한 공 더 뚫는다고 내부적으로 합의를 봤대. 풀죽은 목소리를 듣곤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가만히 있는 나를 두고 부장은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 황급히 그를 따라갔다.

그는 벌써 차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나는 부장을 따라 옆좌석에 앉았다.

담배를 꺼내 문 그를 쳐다보았으나 이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내 가슴 어느 한 켠에 미련이 남아 있었던가.

나는 무심코 바람결에 묻어올 석유내를 맡기 위해 차창 밖의 대기 중에 얼굴을 내밀곤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엔 차가 이미 주차장을 빠져나와 공항으로 가는 대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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