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균동감독 '죽이는 이야기',벗기는 영화를 벗긴 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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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경제파국으로 만사가 시큰둥한데 어디 '죽여주는' 이야기 없을까. 여균동감독이 “여기 있다” 며 나섰다.

제목 조차도 '죽이는 이야기' 다.

- 뭣이 죽여주는가.

“여관방에서 몰래카메라로 음란한 장면을 보여준다.”

- 그런 이야기가 '죽이는' 이야기인가.

“'죽인다' 에는 속된 뜻으로 화끈하다는 것도 있지만 여기서는 글자그대로 끝장난다는 것이다. ”

- 잘 만들었나.

“못만들었다. ”

- 그래도 의도한 게 있겠지.

“우리 자신이 여관방처럼 밀폐되고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네 삶은 여관방에서의 섹스 만큼 퇴폐적이고 무의미하다.

누구나 몰래카메라의 훔쳐보기와 같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

그래서 영화를 미리 보니. 달동네 구석방에서 시나리오를 써대는 3류감독 (문성근) 은 돈독만 오른 제작자나, 싸구려 환상에 젖어서 짜증투성이인 여배우 (황신혜)가 어떤 요구를 하든 모두 받아들일 태세가 돼있다.

그는 예전에 영화를 꽤 잘만들었다고 생각했는 데 흥행에서는 망해버렸다.

그통에 흥행에서 성공하지 않는 한 작품도 감독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이제 그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섹스신을 일부러 넣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위인이다.

그러나 그는 작품성도 살리고 싶다.

그러니까 섹스신은 타협이다.

이런 어정쩡한 상태에서 진척이 있을까. 동네 여관방을 빌려 시나리오 작업에 전념하려고 하지만 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여배우의 접근에 휘둘리고 만다.

여관 종업원이 투숙객들을 몰래카메라로 찍은 비디오를 보며 “이처럼 사실적인 영상이 어디 있겠는가” 하며 자신의 신작에 몰래카메라를 도입할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자칭 하비 카이텔이라는 야비한 배우 (이경영)에게 말려 들어 감독은 쇠고랑을 차는 신세가 된다.

결국 주연배우들이 야합해서 외국 폭력영화를 적당히 모방한 작품을 내놓게 된다.

영화는 지극히 종말론적이다.

'죽이는 이야기' 는 결국 알량한 의도를 펼려고 했던 감독을 죽이게 되는 이야기가 된 셈이다.

피상적인 가치추구에만 매달리는 한국영화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하고 자문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감독이 자기 꾀에 스스로 넘어가 나약하게 몰락하고 마는 것처럼 여균동감독의 이 영화도 영화의 부분적 재미만을 쫓다가 공감을 얻어내기 보다는 어정쩡하게 얼버무리는 것이 되어버린다.

섹스신을 무리하게 넣으려다 벽에 부딪힌 감독을 보여주는 영화 그 자체도 당연히 무리하게 벗기기 장면의 눈요기를 추구하고 있다.

스스로 비판하려고 했던 부정적인 행태에 말려들어가고 만 것이다.

따라서 감독이 고뇌하며 보여주려고 했던 예술창작의 괴로움과 현실의 압박감을 드러내려는 의도는 잘 와닿지 않는다.

여균동감독의 '영화만들기 항복선언' 이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독특한 성격으로 나서는 아마추어 연기자들은 대단하다.

여관종업원 역할로 나선 삐삐롱스타킹의 전멤버 고구마의 환각적인 모습은 추잡한 관계의 남녀들을 매일 상대하면서 몸에 배게되는 껄렁함을 여지없이 재현했다.

실제 실력파 기타리스트였던 김병호와 애틋한 섹스신 대역배우로 나선 전이다의 육탄연기들은 문성근.황신혜의 노련미 넘치는 연기 못지않게 돋보인다.

채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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