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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넘긴 외환위기…워싱턴 분위기 "의회 휴회중이라 천만 다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미 의회가 휴회중이라 한국으로선 천만다행이다. ”

워싱턴의 한 신문사 외신부장을 만났더니 대뜸 건네는 말이었다.

국회가 열려 있는 기간이었다면 IMF의 구제금융 발표가 그렇게 신속하게 이뤄지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미 정부는 3년전 멕시코위기 때 협의도 없이 뭉칫돈을 밀어넣었다가 의회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그래서 이번 아시아위기에선 IMF를 앞세우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는데도 의회는 여전히 탐탁지 않다.

“방만한 경영으로 도산위기에 빠진 아시아 국가들을 미국민들의 세금으로 구해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한국에 약속한 50억달러가 미 정부의 호주머니 (통화안정기금)에서 나오는 것이며 미국은 IMF의 기금에도 최대 출자자다.

미 의회로선 목소리를 높일 만하다.

“재정적자를 줄이자며 사회보장조차 제대로 못해주는 처지에 엄청난 돈을 들여 남의 나라를 돕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

“저임금으로 우리 근로자의 일자리를 빼앗아온 나라들이다”

“멕시코를 구해주었기 때문에 버릇만 나빠졌다.

한국을 구해주면 앞으로 다른 나라에서 더 큰 금융위기를 자초할 것이다. ”

하원 원내총무 딕 아미 (공화당) 를 비롯, 공화당과 브루킹스 연구소 등 보수진영에서 들려오는 비판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미 하원 금융위 소속 공화당의 버나드 샌더스 의원은 최근 의원들의 이같은 분위기를 담은 글을 LA타임스에 기고했다.

민주당 의원들의 생각도 비슷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시아 국가들이 민주당 의원들의 표밭인 블루칼라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과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은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과 지난주 수요일 의회로 공화당과 민주당 지도부를 방문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문제가 미국의 경제.안보이익에 직결돼 있음을 설명하고 금융지원의 정당성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미 정부는 24일 다른 G7 국가들과 함께 제2저지선으로 약속했던 지원금의 일부를 조기 집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내년초 다시 문을 여는 의회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행정부의 태도변화다.

물론 미 정부의 방향선회는 자칫 문제가 일본으로 번지면 미국의 경제안보마저 위협할지 모른다는 판단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 의회를 통해 반영되는 여론의 흐름은 행정부의 판단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만일 내년초 미 의회의 논의가 분분해지면서 한국의 자구노력에 대해 의문을 품는 방향으로 분위기가 기울면 우리의 '고통분담 기간' 만이 필요이상으로 길어질 게 뻔하다.

워싱턴 = 이재학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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