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당선자,IMF이행약속 못믿는 워싱턴·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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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는 이제 독재권력이나 지역감정과는 완전히 다른 거대한 상대를 만났다.

바로 '시장' 이다.

그것도 최근의 아시아 위기에서 보듯 웬만한 나라 몇개 쯤은 눈하나 꿈쩍 않고 곤경에 몰아넣을 수 있는 국제자본시장이다.

지난 18일 (현지시간) 월가의 다우존스 주가는 1백11포인트 떨어졌다.

이날 AP가 뉴욕발로 타전한 하락 이유는 '한국 대선의 결과가 아시아 경제 위기와 미국 기업의 이익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서' 였다.

"미국 투자자들은 노동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金당선자가 IMF의 요구 조건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충돌할 노동계를 어떻게 설득할지 궁금해하고 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 (현 아시아 소사이어티 회장) 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지적했다.

대선 이후 위기 극복을 위한 수순 (手順) 을 바쁘게 밟아가고 있는 한국은 "이만하면 믿어 줄 만 하지 않느냐" 고 생각할 수 있지만 워싱턴과 월가는 여전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 한국은 아시아 위기의 일부일 뿐이다 = 미국은 일본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현재의 아시아 위기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먼길' 을 돌아가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확실한 해법이 마련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시아 위기와 관련, 지난 주 가장 큰 뉴스는 한국 대선이 아니라 일본의 감세 (減稅) 발표였다.

감세조치로 나타난 일본의 정책 선회는 최근 워싱턴이 올린 큰 '수확' 이었다.

미국의 대외경제정책에 정통한 프레드 버그스텐 국제경제연구소 (IIE) 소장은 지난 주 세계은행에서 가진 세미나를 통해 최근의 구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구제금융이란 땜질처방 대신 ▶일본의 내수위주 경기부양▶동남아 각국의 경상수지 개선▶경쟁적인 평가절하 차단이 함께 이뤄져야 '대공황' 과 같은 세계 경제의 파국 가능성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구도 아래선 한국의 위기 탈출도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 서울 주가가 빠지는데 월가의 반응이 좋을 수는 없다 = 대선 직후 미국 주요 언론의 서울발 보도는 모두 다 '친노동.반재벌로 알려진 金당선자에 대한 불안으로 주가가 크게 떨어졌다' 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20일자 뉴욕타임스지는 익명의 미국 관리들을 인용, "金당선자가 공장폐쇄.은행영업정지등 실업과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는 개혁 조치를 망설이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다" 고 까지 보도했다.

IMF와의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金당선자의 거듭된 언명이 아직은 워싱턴.월가를 안심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 대사도 "월가는 金당선자의 과거 역정에 비추어 앞으로 취할 조치에 대해 여전히 신뢰감이 없다" 며 "이들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조치들이 취해져야 한다" 고 강조했다.

◇ 구체적 실행 계획이 아직도 부족하다 = 지난주 김만제 (金滿堤) 포철 회장이 클린턴 대통령의 최측근인 버넌 조던 변호사와 함께 월가의 최고경영자들을 만났을 때 이들이 공통적으로 전한 메시지는 "IMF의 조건을 지킨다는 말만 있지 더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없다" 는 것이었다.

이번 모임을 주선했던 김석한 재미 변호사는 "월가는 한국 경제의 근본상황이나 장기전망이 좋다는데는 다들 동의하고 있지만 한국이 최근 환율.금리등에 대해 취한 조치같은 긍정적인 프로그램이 더 확실하게 제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고 전했다.

워싱턴 = 김수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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