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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에 얽매여 미래 못 보는 북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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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북한의 김정일 정권 역시 단선적인 경험에 얽매여 미래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게 아닐까. 2006년 10월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했을 때 나는 ‘6자회담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3개월 만에 북·미는 베를린에서 만났고, 이듬해 2월 13일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 진전된 합의가 이뤄졌다. 지난해 8월 북한이 약속했던 핵시설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미국은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 시기를 늦췄다. 북한은 즉각 “핵시설을 복구하겠다”는 으름장으로 맞섰다.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는 물러섰다. 올 1월 “김정일 위원장과 만날 용의가 있다”는 버락 오바마 새 정부가 출범하자 세계는 북·미 관계의 진전을 예상했다. 그러나 북한은 보란 듯 미사일 발사를 강행, 유리한 협상 위치 선점에 나섰다. 유엔 안보리가 강력한 비난 성명과 제재 방침을 내놨지만 북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6자회담 거부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요원 추방 카드로 맞섰다. ‘성공한 경험’의 노예가 돼버린 북한은 이제 ‘벼랑 끝 전술’을 ‘검증된 전략’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북한의 이 같은 대응은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다. 북한의 행태를 반복적으로 경험한 한국과 미국은 과거와 유사한 대응 방식을 택하기가 쉽지 않다. 미 정부 관계자는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공개적으로 평양 방문 의사를 밝혔는데도 북한은 이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더 이상 그런다면 구걸로 비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대선 당시 오바마 캠프에서 일했던 인사는 “지금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미사일까지 쏜 북한을 오바마가 돕겠다고 나섰을 때 이를 지지할 미국인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제 북한을 과거의 경험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북한이 요구하는 것과 남한 그리고 서방세계가 수용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이 커지면 커질수록 타협의 가능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결코 북한의 편이 아니다.

김정욱 워싱턴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