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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가 있는 아침 ] -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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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안도현(1961~ )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부분

한 며칠 집을 비워두었더니
멧새들이 툇마루에 군데군데 똥을 싸놓았다
보랏빛이었다
겨울 밤, 처마 아래 전깃줄로 날아들어 눈을 붙이다가 떠났다는 흔적이었다
숙박계가 있었더라면 이름이라도 적어놓고 갔을 걸

나는 이름도 낯도 모르는 새들이
갈겨놓은
보랏빛 똥을 걸레로 닦아내다가
새똥에 섞인 까뭇까뭇한, 작디작은 풀씨들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멧새들의 몸을 빠져나온 그것들은
어느 골짜기에서 살다가 멧새들의 몸 속에 들어갔을꼬, 나는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후략)



한두달 비어 있던 시골집을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누가 어깨를 톡 쏘는 것이었다. 처마 밑에 집을 짓기 시작한 말벌의 기습이었다. 빈집을 용케도 알아차리고 집을 짓는다는 말벌. 그들에게 이 뒤늦게 들어온 세입자는 침입자에 불과할 뿐. 금세 부풀어 올라 욱신거리는 어깨를 싸매고 나는 그 집의 동거인들에게 신고식을 치렀다.

나희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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