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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부총리가 사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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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경제가 어렵다 보니 요즘은 모이기만 하면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 말이 많다. 얼마 전 경제계 인사들과 가진 저녁자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연스레 화제가 이헌재 경제부총리에 대한 얘기로 옮겨졌다.

"요새 이 부총리는 뭐하지. 너무 조용하네. 수도 이전이다 뭐다 해서 어수선한데, 부총리 얘기는 통 들리질 않아."

"글쎄, 지난 2월 취임 때는 이 부총리가 경제정책에 관한 한 전권을 위임받은 것으로 알았는데, 요새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 굵직한 경제정책은 죄다 무슨 위원회에서 결정되고, 장관들과 여당도 생각이 제각각인 것 같더라고."

"그래서야 통솔이 되겠나. 솔직히 경제부총리가 세금말고 뾰쪽한 정책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경제부총리 자리는 그동안 부침이 많았다. 경제부총리가 경제정책에 거의 절대적 조정권을 행사하던 경우도 있었지만 5공 초기의 김재익이나 6공 때의 문희갑, YS 때의 이석채처럼 청와대 경제수석의 입김이 더 센 경우도 있었다. DJ 초기에는 아예 경제부총리를 없애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로 경제부총리는 정부의 공식적인 경제정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막중한 자리로 통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 난국을 헤쳐 나왔다. 물론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업 입장에서는 경제부총리가 때로는 무섭기도 하고, 때로는 껄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려울 때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믿음직한 존재였다. 경제부총리 입에서 된다면 되는 것이요, 안된다면 안되는 것이었다.

리더십과 추진력에 관한 한 이 부총리는 쟁쟁했던 역대 경제부총리에 전혀 밀리지 않는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금융감독위원장으로서 여러 군데서 욕을 먹으면서도 뚝심있게 부실 금융회사의 환부를 도려낸 인물이다.

지난 2월 부총리로 정부에 돌아왔을 때만 해도 과거의 기세가 여전했다. 그는 "분배보다는 성장이 급하다. 시장이 어린이 놀이터인줄 아느냐"며 경제정책의 중심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를 둘러싼 그간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듯했다.

"헤비급이 오니까 역시 다르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당찬 기세가 사그라지는 느낌이다. 지난 5월 중순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안을 판결하기 전날, 그는 예정에 없던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이것저것 해봤지만 배가 안 가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선장인 나에게 맡길 것"이라며 경제사령탑으로서의 속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고 있다. 수도 이전 계획이나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 등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메가톤급 정책이 발표되는 데도 이 부총리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최근 이 부총리는 수도 이전에 대한 질문에 "2007년부터나 자금이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당장 경제에 구체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의 답변에선 경제 수장(首長)의 면모가 보이질 않는다. 45조원이면 정말 수도 이전이 가능한 것인지, 또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수도를 옮기는 게 옳은 선택인지에 대해선 묵묵부답이다.

이제는 경제부총리가 '회복 시점이 2분기 말이다, 3분기다'하는 식으로 말해봐야 경기가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소신껏 정책을 펴보고, 그게 잘 안되면 미련없이 자리를 던지겠다는 선장의 각오 없이는 앞으로도 배는 움직이기 힘들어 보인다.

고현곤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