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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지도]76.힙합(1)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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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최초의 인간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고고학계의 정설이다.

20세기 지구촌을 주름잡는 대중음악 역시 인간의 조상처럼 아프리카의 혈통을 이은 흑인들의 몸에서 출발하고 있다.

흑인하면 아직도 낯설고 편견이 남아있는 한국조차 최고의 인기가요장르 댄스를 보면 흑인음악의 리듬을 차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유럽계열의 단순 비트가 우세했던 한국의 댄스계도 현재는 힙합이 천하를 호령하고 있다.

H.O. T.젝스키스.지누션.언타이틀등 한다하는 인기그룹들은 모두 힙합리듬을 바탕으로 한 댄스를 구사한다.

하지만 힙합만큼 국내에서 모호하게 사용되는 장르도 없을 것이다.

가요사전심의가 존재하던 90년대초반 한 댄스그룹이 '힙합팀' 이란 곡을 음반에 실으려하자 공륜이 "힙합은 마약을 뜻하므로 제목으로 쓸 수 없다" 고 으름장을 놓은 해프닝은 이 땅에서 힙합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팝송중 금지곡이 가장 많은 장르 역시 헤비메탈처럼 두들겨대는 음악이 아니라 힙합이다.

가요를 좀 안다는 사람들도 힙합과 랩, 리듬 앤드 블루스등을 혼동하는 일은 많다.

어원으로만 따져본다면 힙은 Hip, 즉 엉덩이를 뜻하고 합은 Hop, 즉 펄쩍 뛴다는 뜻이다.

둘을 합쳐본다면 움직이는 엉덩이, 다시말해 약동하는 육체를 의미하는 셈이다.

이 육체는 음악적으로 바라보면 리듬의 근원지인 흑인의 육체를 뜻하고 문화적으로는 그 흑인들의 제반 생활양식과 정서를 포괄한다.

니거 (검둥이)에서 아프로 아메리칸 (아프리카계 미국인) 으로 호칭은 점쟎게 바뀌었지만 아직도 사회전반적으로 소외되고 낙후된 미국흑인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음악과 문화 전체가 힙합인 것이다.

흑인들에게 지긋지긋한 일상으로부터 한시적 탈출을 제공하고 권력관계를 역전시켜주는 힙합은 헐렁대는 춤과 끝없이 지껄이는 랩으로 형상화된다.

많은 흑인들에게 이것은 위안을 넘어 삶 그 자체가 된다.

이 힙합이 비교적 뚜렷한 음악적 형태를 갖추고 국내에 상륙한 것은 80년대 초반의 브레이크 댄스붐을 통해서다.

영화 '플래시 댄스' ,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비디오등에서 단편적으로 소개된 미국팝스타들의 춤을 한국 청소년들이 무작정 따라하면서 흑인의 자극적인 리듬이 이땅 젊은이들의 몸에 입력되기 시작했다.

잭슨등 팝스타들은 흑인들이 노예시절부터 개발한 노동무, 즉 케이크 워크.래그 타임.재즈 댄스등을 차례로 소화해 춤을 만들었지만 한국의 청소년들은 브라운관의 화려한 조명아래 비춰지는 춤의 외면만 받아들였다.

당시 국내의 힙합문화는 패션에 불과했으나 90년대들어 브레이크 댄스에 한국대중가요를 파격적으로 연결시킨 천재들에 의해 힙합의 한국화가 시작된다.

도저히 화해할 수 없어보였던 랩과 한국어를 접목해낸 서태지와 아이들 (이하 서태지) 의 '난 알아요' 는 우리말의 분절구조를 파괴하면서도 우리 신세대의 감각에 찰싹 달라붙는 언어세계를 보여줬다.

음수율에 종속된 운문대신 생각나는대로 말하는 산문을 선호하는 젊은이들의 언어세계를 음악으로 구현한 것이다.

서태지이후 랩은 자연스럽게 우리말과 결합했고 힙합리듬은 가요계를 빠르게 접수하기 시작한다.

서태지는 갱스터랩까지 넘나들며 다양한 힙합의 변용을 시도했고 많은 댄스가수들이 서태지의 뒤를 따랐으나 그가 내건 힙합의 대의에 동참할만한 파트너는 93년 이현도.김성재가 결합해 만든 듀오 듀스 정도였다.

따라하기 힘든 고속랩과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은 고난도의 격렬한 춤으로 주변 댄스가수들을 멀찍이 떨궈낸 듀스는 94년 발표한 2집 '듀시즘' 을 통해 말그대로 힙합의 한 '이즘 (주의)' 의 담지자로 떠오른다.

늑대소리라고 느껴질만큼 야성적인 스크래치 사운드는 세련됐고 리듬 앤드 블루스.랩.재즈까지 흑인음악의 조류를 나름의 틀에 맞춰 혼합한 편곡은 그들이 힙합음악안에 녹아있는 원시적 충동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서태지보다 좀더 흑인에 가까운 음악으로 힙합의 작가로까지 격상되지만 95년 3집을 넘기면서 국내가요시스템의 상업주의와 충돌, 결성 2년만에 해체된다.

1년뒤에는 서태지도 같은 이유로 해체됐고 그 이후 댄스계는 '제2의 서태지' '제2의 듀스' 등으로 지칭되는 이른바 키즈그룹들로 중심세력이 재편된다.

키즈그룹들의 음악적 성과는 논란거리다.

이들은 두 선배와 달리 스스로 곡을 쓰지 않는다.

음악생산자는 따로 있고 가수는 몸과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그렇다고 그들의 음악적 존재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들은 선배의 음악에서 상품적 요소를 가려내 재창조함으로써 자기들의 영역을 구축해 가고 있다.

댄스음악의 원동력인 '새로움' 은 그들의 것이다.

하나 그 새로움을 완벽히 인정받기 위해 그들은 한국적인 변용을 성취해야하는 과제를 안고있다.

올해에는 특히 '본바닥' 미국에서 공수된 '정통 힙합' 그룹들이 등장해 분위기를 주도했다.

재미교포 김진우와 서태지의 백댄서였던 노승환이 뭉친 지누션은 느린 힙합리듬속에 또래 젊은이들의 우정을 담은 '가솔린' 으로 힙합의 중심을 댄스에서 사운드로 다시 옮겨왔다.

날카로운 랩과 인상적인 후렴구, 수시로 끼어드는 낯선 악기들의 조합등이 자유로운 것 같으면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 힙합의 맛을 제공한다.

그러나 서태지.듀스를 의식한 창법때문에 지누션은 선배 컴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서태지로부터 확실한 거리를 확보한 힙합그룹으로는 "코리아에는 여자 래퍼가 별로 없어/그래서 내가 왔다" ( '내일을 위해' ) 고 당당히 외치는 파워래퍼 윤미래 등 미국도시 뒷골목에서 흑인아이들과 놀던 교포젊은이들이 모여만든 업타운일 것이다. 흑인거리에서 성장한 이들은 딱딱 쪼개지다가 미끌거리며 접합되는 리듬감, 육중한 공세적 음색, 볼륨있는 춤사위등 검은 피부의 친구들에게서 체득한 힙합의 요체를 능숙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자기 피속에 흐르는 트로트 유전자를 부인하지 않지만 힙합이 '숨쉬는 리듬의 음악' 임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가장 원단적인 힙합을 들려준다.

그러나 평론가들의 호의적평가에 비해 대중적 반응은 상대적으로 느리다.

여기까지가 숱한 힙합그룹이 명멸하는 한국가요계의 현주소일 것이다.

서태지와 듀스에 의해 가요와 만난 힙합은 그후로 지금까지 국내에서 미완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리듬속에 저항과 자유정신을 간직한 이 검은 음악은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고 새로움속에 몸을 던지는 사람 곁에서만 숨을 쉰다.

한 장르의 뿌리까지 내려갔다가도 전혀 이질적인 장르로 점프할 수 있는 순수한 음악적 욕망의 소유자에게만 힙합은 그 어둡고 깊은 속을 열어보일 것이다.

글 = 강찬호 기자, 사진 = 박순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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