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미디어정치 원년' 그 허와 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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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망의 대통령 선거일이 이제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각 진영의 대선 캠페인도 부동층 확보에 마지막 기치를 올리고 있다.

아직 결과를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이번 선거는 한 가지 면에서 역대 선거와 크게 구별된다 할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선거운동에서 언론매체의 중요성이 매우 커졌다는 점이다.

이번 대선을 치르는 1997년을 '미디어 정치의 원년' 으로 특징짓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다.

연속극처럼 보게 된 정치 언론매체를 이용한 선거운동은 기존의 선거풍토를 크게 바꿔 놓았다.

특히 금권주의 선거 배격에 혁혁한 공헌을 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언론기관들이 대신 엄청난 수익을 올리기는 했으나 돈봉투를 매개로 군중을 모으는 세몰이식 선거운동의 폐단을 제거해 주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각 후보의 정강.정책이 전파 미디어를 타고 각 가정의 안방까지 전달되므로 '유권자 친화적' 선거풍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은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선거운동의 투명성과 후보간 정책적 차별성이 크게 부각됐다는 점에서도 '미디어 정치' 의 공헌과 위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종합적인 견지에서 볼 때 이러한 '미디어 정치' 는 득 만큼이나 실 (失) 도 큰 것으로 평가된다.

왜냐하면 대선을 가상 (virtual) 의 선거로 둔갑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감 (感)' 을 느낄 수 없는 정치, 분장한 얼굴과 표면적 화술이 판치는 오락성의 정치가 양산됐고, 60초의 광고 안에 유권자를 사로잡아야 하는 찰나적 정치가 새로운 규범으로 자리잡았다.

선거 전 1주일이 되도록 조용한 학교 운동장, 썰렁한 거리는 정치란 바로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연속극을 보듯 저 건너편에 있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는 감동이 없는 정치며, 희망과 열망이 없는 박제된 정치다.

제한적으로나마 유세가 되살아나야 한다.

유세장의 박수와 함성 속에서 후보와 유권자가 맞닿는 가운데 정치에 열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영상매체의 정치는 유권자의 정치적 무관심과 수동성을 심화시키고 기만적인 수사학과 연기를 정치의 본질로 호도하게 만들 수 있다.

특히 TV토론 수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다한 토론 빈도는 최소한 두 가지의 간과할 수 없는 허점을 노출시켰다.

그 중 하나는 토론 빈도가 늘어갈수록 후보간의 정강.정책적 차별성이 점점 줄어들게 되고 마는 수렴현상이다.

토론 횟수의 증가는 후보들의 학습기회를 높여주고 급기야 후보간 차별성을 없애 대선을 정책대결에서 이미지대결로 전락시켜버렸다.

또 다른 하나는 정강.정책 토론과 같은 본질적 장점은 퇴색된 채 그저 인식공격 등 여과되지 않은 흑색선전의 상례화를 야기시키고 말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선거일이 가까울수록 오히려 부동표가 증가했다는 역설적 현상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언론 특정후보 지지 필요 언론매체의 인위적 중립성 또한 문제시된다.

이번 대선기간중 언론기관들은 강요된 중립성과 묵시적 편향 사이에서 제자리를 잡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위선의 탈을 과감히 벗어야 한다.

미국의 경우처럼 한국의 언론기관들도 특정후보를 지지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어야 한다.

보도의 중립성은 유지하되, 사설 등을 통해 특정후보에 대한 지지입장을 명백히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유권자의 혼동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다.

유권자들은 이 축제의 주인공이지 관람객이 돼서는 안된다.

'미디어 정치' 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감동과 열기, 그리고 참여가 되살아날 수 있도록 선거운동 관련제도가 개선돼야 할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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