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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기행]24.'겨울나그네'…가평 남이섬,쓸쓸해서 더 아름다운 곳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저녁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굴뚝위의 흰 연기처럼 젊은날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우리들의 젊은날이여. ' , 80년대 최고 인기작가 최인호의 소설을 영화화했던 '겨울나그네 (86년제작, 곽지균감독)' .얼어붙은 강변과 마른 풀들이 무성한 강둑, 앙상하게 늘어선 은사시나무 끝에 서있던 겨울별장, 눈내리는 호수…. '겨울나그네' 는 추울 것만 같은 겨울풍경을 오히려 따뜻한 영상미로 녹여내 연인들을 훈훈한 겨울여행의 낭만속으로 이끌었다.

'겨울나그네' 의 배경은 경희대 캠퍼스와 동두천의 기지촌, 그리고 경춘선의 철로변 풍경과 가평의 남이섬 등이다.

캠퍼스 시절, 한번쯤 다녀왔을 M.T. 경춘선을 따라가면 마석.대성리.청평.가평.경강등 아직도 대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M.T 명소들이 즐비하다.

그런 때문인지 '겨울나그네' 의 영상을 떠올리는 것은 바로 젊은날의 추억을 되살리는 겨울여정이기도 하다.

특히 의대생 민우 (강석우扮) 와 첼로를 전공하는 음대생 다혜 (이미숙扮)가 첫사랑을 불태웠던 강변의 겨울별장 풍경은 오래도록 잔상 (殘像) 으로 남는데 실제 그 촬영지는 남이섬이었다.

눈내리는 밤을 함께 지새고 난 푸른 새벽. 민우는 다혜가 보는 앞에서 형사들에게 연행된다.

민우와 다혜가 다시 호젓하게 재회하는 얼어붙은 강변도 남이섬에서 찍었다.

서울의 수은주가 유난히 뚝 떨어지던 날 남이섬을 찾았다.

겨울 강심 한가운데 떠있는 남이섬. 선착장에 묶여있던 낡은 철선을 타고 섬으로 갔다.

선실 한가운데 놓인 연탄난로 주변엔 열명도 채 안되는 손님들이 온기를 찾아 오그르르 모여 들었다.

샛강은 하얗게 얼어붙었다.

여름과 가을내내 북적거렸을 유원지에는 폐허처럼 텅빈 가게들만이 스산하게 서있다.

다혜를 남기고 민우가 형사들과 사라졌던 길은 남이섬 잔디구장 끝에 있다.

병정처럼 두 줄로 도열한 은사시나무들은 세월의 부피만 더했을 뿐 영화속의 풍경 그대로다.

상한 가지 속으로 드러난 까치집들과 마른 풀을 뜯는 검은 염소떼들, 어디선가 틀어놓은 스피커 음악소리마저 없다면 남이섬의 겨울풍경은 더욱 쓸쓸했을 것이다.

유일하게 영업을 하고 있는 남이섬호텔 커피숍에 들러 뜨거운 커피로 몸을 녹이고 있는 한쌍의 연인을 만났다.

"쓸쓸해도 여행은 겨울에 떠나는게 낭만적이예요. 가을나그네 보다 겨울나그네가 더욱 고독해 보이잖아요. " 어느덧 겨울나그네가 되어버린 연인들은 커피숍을 나와 이젠 거의 고목이 된 밤나무 밑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해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먼훗날 저들의 사랑이 어떻게 결실을 맺을까. 젊은날의 사랑은 또 그렇게 가고 있었다.

가평 = 이순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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