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은행 보고서에 나타난 청와대·재경원 '마이동풍'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최근의 경제난국에 대한 책임규명이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한은이 내부용으로 작성한 관련 보고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한은의 내부 보고서라는 점에서 한은의 입장을 주로 대변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적어도 당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아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은 관계자들은 한은총재란 자리가 외환관리의 최고위 책임자중 하나란 점에서 이경식 (李經植) 총재의 책임은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그동안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온 사실은 알아줬으면 하는 분위기다.

한은은 특히 지난 3월중순부터 외환위기 가능성에 주목하고 "비상시기에는 IMF 구제금융이 필요하다" 는 입장을 정리한 것만 봐도 오늘의 상황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 왔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기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기 전인 10월초까지만 해도 한은은 재경원의 '걱정없다' 는 발표에 각종 자료로 장단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앞서의 주장은 별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10월 들어서다.

李총재는 10월말 이후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이런 경고는 대책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金대통령의 위기관리능력에 의문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은 고위관계자는 특히 "외환위기와 관련해 李총재가 대통령에게 직언을 많이 했는데도 청와대측이 귀담아듣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 고 말했다.

예컨대 한은이 '적신호' 를 여러차례 보냈으나 청와대와 재경원이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실례로 IMF 구제금융 신청 결정도 사실상 지난달 13일에 했으면서도 발표를 21일까지 미루는 바람에 국내 외환시장이 벼랑끝으로 몰리게 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은은 IMF 구제금융지원 시기를 그나마 앞당길 수 있었던 것도 재경원이 끝까지 망설이던 외환보유액과 외채 실상을 한은이 있는 그대로 IMF실사단에 보고했기 때문이라고 자평한다.

정부의 가장 큰 실책은 금융개혁법을 둘러싼 밥그릇 싸움으로 '금융시장안정대책' 이 열흘이나 늦게 나왔다는 점이다.

외환보유고가 큰 폭으로 줄어들자 李총재는 지난달 9일 강경식 (姜慶植) 전부총리.김인호 (金仁浩) 전청와대경제수석을 만나 "더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 이라고 털어놨다.

이에 따라 이들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환율 변동제한폭 폐지▶IMF구제금융 신청▶외환규제 대폭 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한은측 안의 필요성은 공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姜전부총리는 금융시장 안정을 금융개혁법과 연계하면서 국회를 찾아다니는 바람에 대책마련이 늦어졌다.

이 와중에는 재경원의 내분도 한몫 했다.

지난 10월부터 경제정책국과 국책연구기관들도 환율변동제한폭 폐지와 종금사 영업정지 등 특단의 대책이 시급하다고 촉구했으나 금융정책실은 "금융을 모르는 사람들이 나선다" 며 이같은 건의를 묵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한은 주변에서 "하루가 급한데도 재경원 관계자들은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는 비난이 흘러나왔다.

또 외환시장에는 재경원과 한은의 손발이 맞지 않아 외환정책을 그르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결국 개각이 단행된 19일에야 신임 林부총리가 환율변동폭 확대.금융기관 구조조정 등을 담은 '금융시장안정대책' 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때도 IMF구제금융신청은 없는 일로 감추었다.

물론 한은에도 책임이 있다.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벌써부터 알았으면서도 왜 외부적으로는 재경원에 장단을 맞춰 "문제가 없다" 고 해왔느냐는 것이다.

또 외환위기 해결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다는 비난도 있다.

이에 대해 한은 관계자들은 "재경원과 달리 직접 나설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다" 고 항변한다.

결국 통치자의 리더십 및 위기관리능력 부재, 당국자들의 안일한 상황판단, 부처간 이기주의 등이 어우러져 국민 모두에게 고통을 들씌운 것이다.

박의준.이상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