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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삼 칼럼]속 '삼전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1639년 1월30일 청군의 포위공격에 견딜 수 없게 된 인조는 마침내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 (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의 예 (禮) 를 올리며 용서를 빌었다.

말이 좋아 항례 (降禮) 지 철저한 모욕의 의식이었다.

인조는 수항단 (受降壇) 위에 높이 자리잡고 앉은 청태종의 발밑에서 이마를 바닥에 대고 조아려야 했다. 그것도 무려 아홉 차례나…. 뿐만 아니었다.

청은 인조의 장자와 차자를 인질로 요구하는 등 11개의 항복조건을 내걸었고 인조는 이를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1997년 12월4일자 조간신문들에 일제히 실린 임창열 (林昌烈) 경제부총리와 이경식 (李經植) 한국은행 총재의 서명장면은 바로 이 삼전도의 비극을 떠올리게 했다.

이런 심정을 결코 자학이라 할 수만은 없다.

등뒤로는 우리나라의 기라성 같은 경제관료들이 굳은 표정으로 시립 (侍立) 해 있고 그 경제관료들의 우두머리라 할 경제부총리와 한은총재가 침통한 얼굴로 서명하는 모습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는 미셸 캉드쉬 IMF총재. 이런 장면의 사진을 보면서 삼전도의 비극을 연상했다고 해서 지나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까지도 굴욕을 맛봤다.

협상이 타결된줄 알고 대통령이 국무회의까지 소집해 놓은 마당에 캉드쉬 총재가 전화로 추가조건을 요구해 대통령이 국무회의장을 떠나야 하는 치욕적인 해프닝까지 있었다. 그뿐인가.

IMF는 대선후보들에게까지도 보증각서를 요구했다.

청태종이 인조의 장자와 차자를 인질로 요구한 것과 흡사하다.

아니, 따지고 보자면 그보다 더 무리하고 가혹한 요구다. 대선후보들은 법적으론 현 정권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민간인일 뿐인데 어떻게 채무에 대한 보증각서를 쓰라는 것인가.

상식을 초월한 요구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3당 후보들은 거절했다가는 혹시 일을 그르쳐 여론의 비판을 받을까 두려워 별로 버티지도 못하고 각서를 써주고 말았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기가 막힐 일은 또 있다.

나라꼴이 이 지경이 됐는데 아직까지도 왜 이렇게 됐는지 누구도 분명한 설명을 해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누구는 금융실명제가 그 원인이라고 강변하는가 하면 누구는 정경유착이 원인이라고 한다.

또 금융개혁을 제때 안한 탓이라고도 하고, 또 누구는 구조적 모순 때문에 이런 결과는 이미 예정돼 있었다는 진단을 내린다.

전문가들의 진단은 이렇게 가지각색이고 정부는 꿀먹은 벙어리니 국민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모임에서건 적어도 한번 쯤은 꼭 나오는 말이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됐지" 하는 것이다.

누구로부터도 명쾌한 대답을 들을 수 없고 원인을 모르니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은지 역시 알 길이 없다.

마냥 순진한 것이 국민들이어서 나라가 외화부족에 허덕인다고 하자 장롱 속의 달러를 꺼내 오고 해외여행을 취소하며 나라 경제가 활기를 되찾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어리둥절해진다.

흥청거리는 곳은 여전히 흥청거리는가 하면 대선후보들은 다퉈가며 '국민소득 2만불' 이니, '세계 제5위 경제대국' 이니 하는 천하태평의 장밋빛 공약들을 발표하고 있지 않은가.

이 지경을 당하고도 문제를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가서는 2~3년 뒤에도 경제식민지 신세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책임이 모두에게 있고 그러니 다 함께 반성하고 근검.절약해야 한다는 식의 진단과 처방은 교묘한 책임 회피이자 속임수다.

나라가 이 꼴이 된 주된 원인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정부는 그것을 국민들 앞에 솔직히 밝히고 책임을 따져야 한다.

주된 원인이 무엇이고 부차적인 원인이 무엇인지가 명확해져야 우리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도 따라서 분명해진다.

정부부터가 그저 허둥거리기만 하니 국민들은 불안하기만 할 뿐이다.

대선후보들도 현 경제위기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통해 국정수행을 보여주어야 한다.

허황한 공약에 위로받을 만큼 국민이 어리석지는 않다.

국민들은 허리띠를 졸라 매고 다시 뛸 각오가 돼 있다.

그런 국민들에게 왜 그렇게 해야 하고 또 어디로 뛰어야 할지를 알려주어야 할 책임은 당연히 정부와 대선후보들에게 있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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