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실명제 졸작 당장 없애라…보이는 것만 셈하는 서양이성의 산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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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 민족은 지난 1세기동안 오로지 하나의 꿈을 가지고 살았다.

'개화' 라는 것이다.

개화란 어둡고 폐쇄된 사회에서 밝고 개방된 사회로 가는 것이다.

나의 부모도 개명한 사회의 꿈을 안고 공부했고 나도 덩달아 공부했다.

회고하건대 도대체 개화의 기준은 무엇이었나. 우리 민족의 모든 선각자들이 꿈꿔온 단하나의 가치관, 그것은 바로 합리성이란 한 단어였다.

개화의 모든 플랜이 이 한 단어의 기준에 의해 짜인 것이다.

합리적 인간을 만들고, 합리적 사회를 만들고, 합리적 정부를 만들자는게 우리 민족이 20세기를 통해 추구해 온 근대성의 정체였다.

그런데 도대체 '합리' 란 무엇인가.

합리란 이성에 합치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유럽 근세이성주의가 규정한 바, 바로 수학문제를 푸는 인간의 능력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내재하는 계량적 추리능력을 추상적으로 총칭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성적 인간이란 수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며, 이성적 사회란 수량적으로 맞아떨어지는 사회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수능시험의 주종이 영.수로 돼 있다.

영어 속에 이성적 인간과 사회에 관한 정보가 다 들어 있고 수학이야말로 이성적 사고를 가르치는 기초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실명제를 주장한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이성주의를 한국사회의 경제유통 구조에 적용하는 것을 우리 역사의 개화의 마지막 소임인 것처럼 믿는 사람들이다.

실명제 도입은 검은 돈을 없애고 하얀 돈만 돌게 해 어두운 사회를 밝게 만들고, 계량적으로 예측 가능하게 만들며, 빈부 격차를 없애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합리적 소비구조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됐나. 안됐다면 앞으로나마 그렇게 될 것인가.

나 도올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오늘 우리 사회가 경험한 실명제 실험은 서유럽 합리주의 이성의 파산이다.

그것은 보편사적 사건이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치졸한 셈본의 졸작이다.

금융실명제 실시 전야! 대전환의 전운이 감도는 어느날 나는 두 사람을 만났다.

경실련사무총장 유재현 박사였다.

"명약관화하오. 국가권력 그 자체를 부정하는 마피아들만 양산해 낼 것이오. " 또 한사람은 당시 한은 조순 총재였다.

"선생님, 실명제 실시가 우리나라를 구원하리라고 믿으십니까. " "나는 반대요. 실명제를 운운하기 이전에 통화정책이나 금융정책으로 접근해야 하리라 믿소. " 실명제는 근원적으로 방법론의 오류였다.

하나 방법론의 오류 그 저편에 있는 더 본질적인 오류는 국가의 비전의 오류였다.

전혀 검토되지 않은 사회정의라는 막연한 가치 속에서 실명제를 비호하고 있는 비겁한 지성의 오류였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게리 쿠퍼로부터 출발했다.

다시 말해 총잡이 카우보이들로부터 출발한 민주주의다.

다시 말해 국가가 국민들에게 권총을 나눠 주고 출발한 민주주의인 것이다.

그러한 사회는 확고한 법제의 합리적 구조가 국민의 삶을 지배하도록 짜여 있다.

하나 우리 사회는 그러한 법제성 (法制性) 이전에 예제적 (禮制的) 도덕성이 지배하며 객관적 절차 이전에 인간적 중재가 더 크게 삶의 중심적 가치로 작동한다.

실명제에 관한 무궁한 논리를 내 머리는 다 자아낼 수 있지만 여기 그를 다 펼칠 공간이 없다.

한마디로 우리 국민 누구든지 국 (國)에 대한 자기 (家) 의 곳간을 다 들여다보이는 유리로 만들어 놓고 편하게 잠잘 자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돈 있는 자와 돈 없는 자의 문제 이전에 근원적으로 국가의 권력이 국민 개개인의 경제적 삶에 완벽하게 개입한다고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이냐 하는 국가 비전의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다.

나는 합리적 인간을 추구하고 합리적 사회를 추구한다.

하나 내가 말하는 합리성이란 시간이 결여된 수학적 합리성이 아니라 시간의 변화 속에 있는 상황적 합리성이며 생성적 합리성이며 도덕적 합리성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선조 퇴.율선생이 말씀하시는 이기론의 이성이다.

역사 속에서는 이 시점의 합리가 저 시점의 불합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합리를 제거할 것이 아니라 합리 속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것이다.

특히 경제문제에 관한한 노자의 말대로 '유 (有).무 (無)' 를 통섭하는 '현 (玄)' , 즉 검은 세계를 남겨두어야 한다.

코스모스는 카오스 속에서만 작동하는 체계일 뿐이다.

근원적인 문제는 보이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만 해결하려 하고 유위 (有爲) 의 업보를 유위로만 땜질하려는 우리의 근시안적 사고에 있다.

보이는 것이 지은 업보는 궁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해결한다.

실명제는 원점으로 돌려라. 허명제도 실명제와 동일한 정의의 가치로서 재고돼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문제들을 하나둘씩 근원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나는 요즘도 중앙대와 용인대에서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회초리를 든다.

그들의 발가벗은 정강이에 피가 맺히면서도 그들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내가 살아온 삶의 비전과 교육의 비전이 그들의 인간됨의 어떤 확고한 기준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교육의 비전 하나만 해도 우리 경제 해결의 우회의 길은 아닐 것이다.

도올 김용옥 <용인대·중앙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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