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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지원 이후 태국·인도네시아]2.'긴축'에 무너지는 태국기업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상하 (常夏) 의 나라' 태국의 재계에 일찍이 없었던 엄동설한이 밀어닥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IMF) 의 구제금융 지원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태국정부가 휘두르는 '긴축경제' 의 서슬 퍼런 칼날에 부실기업들이 추풍낙엽처럼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업축소와 함께 인원감축.부동산매각등 피나는 감량에 나섰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는 자괴감이 확산되고 있다.

당국통계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9월말까지 전국에서 4천7백12개 기업이 도산했다.

그중 절반 이상이 바트화 폭락이 시작된 7월 이후 무너졌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긴축에 나선 지난 10월부터 적어도 2천여개 기업이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도산기업들은 건설.부동산을 비롯해 유통.여행.자동차등 이른바 내수업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에 돈을 대준 금융기관이나 관련기업들이 뒤따라 쓰러지는 도미노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컨설팅업체인 제임스 케펠의 경제학자 라티야 티라퐁그폰은 이를 "지난 80년대부터 일었던 거품이 IMF구제금융이라는 날카로운 바늘에 찔려 꺼지는 과정" 이라고 표현했다.

지난달 중순 출범한 추안 리크파이 정부는 부실기업들을 과감하게 도태시켜야 한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태국기업들은 바트화 가치폭락에 따른 환차손보다 IMF구제금융 이후 나타난 급격한 구매력 감소와 소비심리 위축에 더 큰 고통을 느끼고 있다.

여기에 금융기관의 신규대출 중단이 목줄을 죄고 있다.

금융기관들도 사정이 급하다.

91개 금융기관중 58개가 이미 영업정지처분을 받아 사실상 문을 닫았고 7일 예정된 '적격판정' 에서 또다시 상당수 금융기관들이 사망진단을 받을 운명이다.

이 때문에 시중은행들은 최근 '정부가 인정하는 우량 금융기관' 임을 알리는 광고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주 태국증시는 최대그룹인 시암시멘트가 도산위기에 처했다는 루머가 퍼지면서 주가지수가 곤두박질쳤다.

시멘트.철강.화학등을 주력으로 하는 시암그룹은 최근 수년간 대대적인 사업확장에 나서 외화부채가 지난 6월말 43억달러로 급격히 불어났다.

지난 5개월간 바트화 가치가 40%이상 떨어지자 엄청난 환차손을 입게 돼 올해만 2억달러 이상의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지난해 65억달러의 매출을 올린 이 그룹은 최근 신규사업을 중단하고 인원감축과 사업축소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태국 최대그룹이 이런 마당에 다른 기업들의 형편은 말할 나위도 없다.

동남아 굴지의 사회간접자본 건설업체인 호프웰은 자금난이 심화되자 사운을 걸고 추진했던 방콕시 고속도로 건설을 스스로 포기했다.

지난달 태국 최대의 관광업체인 프레지던트 투어가 경영난 끝에 도산하고 회장은 자살했다.

대형 에어컨부품업체 리폼프러덕트는 내수시장 판매량이 급작스레 줄어들자 주 6일 근무제를 주 5일로 전환했다.

태국 최대의 냉동식품업체 수라폰푸드는 임금삭감에 대한 노조의 반발이 거세 아예 잠정휴업을 선언했다.

언론재벌인 네이션 멀티미디어그룹등 대부분의 기업이 상여금 지급중단과 임금삭감에 나서고 있다.

기업도산 사태속에서 '일자리를 잃지 말아야 한다' 는 공감대가 확산되며 근로자들도 노조활동을 기피하고 있다.

한 자동차부품 제조업체에서는 지난달 노조가 처음으로 구사대를 결성하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나 일부이기는 하지만 수입원자재 의존도가 낮아 가격경쟁력이 높아진 어류.농산물.경공업제품 수출업체들과 우량 금융기관들은 내심 즐거운 표정이다.

플라스틱 사출제품 수출업체인 사하그룹은 지난 7월 이후 수출실적이 평소보다 20~30% 증가했으며 달러화 결제 덕택에 이익규모가 지난해보다 오히려 커질 전망이다.

방콕 = 임봉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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