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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붓다 8대 성지를 찾아서 ⑤ 라즈기르 죽림정사와 영축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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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500년 경에 세워진 인도의 나란다 대학 유적지. 신라 승려 혜초와 중국의 현장 법사가 이 대학에서 유학했다. 당시 1만 명의 학생과 1000명의 교수가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세계 최초, 세계 최대 불교대학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라즈기르에서 11㎞ 떨어진 곳에 있다.


◆무상한 인도불교사=라즈기르에서 11㎞ 떨어진 곳에 나란다 대학의 유적지가 있다. 서기 500년경에 세워진 세계 최초, 세계 최대의 불교대학이란 기록을 남긴 곳이다. 신라의 승려 혜초도, 중국의 현장 법사도 여기서 유학을 했다.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당시 학생만 1만 명, 교수는 1000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1세기 이슬람의 침공으로 승려는 죽임을 당하고, 교정은 폐허가 됐다. 빛바랜 붉은 벽돌, 인도불교의 역사가 무상했다.

◆무엇이 출가인가=다시 버스로 20분을 달렸다. 라즈기르의 죽림정사로 갔다. 곳곳에 대나무가 보였다. 현지인 가이드 아진트 신하는 “이곳이 죽림정사의 터라는 사실만 확인됐다. 아직 발굴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거기서 70m쯤 떨어진 곳에 연못이 하나 있었다. 35세에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이듬해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이 연못가에서 많은 설법을 했다고 한다.

눈을 감았다. 36세의 젊은 붓다, 그는 여기서 어떤 소리를 토했을까. 붓다는 자신의 출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재가의 삶은 답답하고 번잡스럽다. 깨끗하지 못한 먼지가 어디든 쌓여 있다. 그러나 출가는 드넓은 공간에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머리 깎고 승복을 입는 걸 출가라고 여긴다. 그러나 붓다는 분명히 말했다. “(출가는) 답답하고 번잡스런 삶이 아니라 드넓은 공간에 사는 삶”이라고 말이다. 답답하고 번잡스런 곳이 어디인가. 다름 아닌 ‘내 안’이다. 집착과 욕망으로 점철된 곳이 어딘가. ‘나’라는 집이다. 그럼 드넓은 공간은 어디에 있을까. ‘나’라는 집을 허문 곳에 있다. 답답하고 번잡스런 나, 먼지로 가득한 나, 그 나가 실은 ‘없는 나’임을 깨칠 때 비로소 출가가 이뤄진다. 그러니 머리 깎고 승복을 입었다고 출가자가 아니다. 나를 허물고 드넓은 공간에서 걸림 없는 삶,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이 붓다는 출가라고 했다.

2500년 전, 이 연못가에선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붓다의 설법을 들었을까. 그리고 머리를 깎았을까. 그들 중에 또 얼마가 진정한 ‘출가’를 성취했을까.

불교 최초의 승원이었던 죽림정사 터. 대나무 숲 뒤로 최근에 지은 법당이 보인다.


◆36세 스승과 120세 제자=죽림정사 터를 걸었다. 의문이 생겼다. ‘36세 붓다는 스승으로서는 젊다. 그의 리더십은 어땠을까?’ 경전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있다. 붓다가 처음 라즈기르를 찾았을 때 사람들은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고 한다. 36세의 붓다와 120세의 우루웰라 가섭 중 누가 누구를 가르칠지 궁금했다는 것이다. 그들을 향해 우루웰라 가섭은 말했다. “80년 동안 바람과 불, 해와 달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기도를 했지만 얻은 게 없었다. 그런데 붓다를 만난 뒤 비로소 편안함을 얻었다.” 우루웰라 가섭의 고백에 라즈기르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옛날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문중을 따지고, 법랍을 따지는 불교에는 ‘숨결’이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랬다. 종교가 박제가 될 때는 어김없이 나이를 먼저 따지고, 출신을 먼저 따졌다. 중국의 육조 혜능 대사도 그랬다. 혜능은 새파란 나이의 행자였고, 오랑캐 출신이었다. 그는 스승에게서 깨달음의 인가를 받고도 도망을 쳐야만 했다. 다른 제자들이 그의 ‘깨달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붓다의 승단은 달랐다. 온전히 우주와 하나가 됐는가, 오직 이것만이 스승과 제자를 나누는 기준이었다. 그러니 120세의 우루웰라 가섭은 ‘36세의 붓다’를 본 것이 아니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이 거대한 우주의 숨결을 붓다를 통해서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우주’를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다. 2500년 전, 그 우주의 이름이 ‘고타마 붓다’였을 뿐이다.

◆붓다의 꽃, 가섭의 미소=버스는 영축산으로 갔다. 죽림정사에서 약 50분 거리였다. 산이 그리 높진 않았다. 등산로를 따라 25분 정도 올랐다. 산 정상에는 옛날 붓다와 아난다가 머물던 정사 터가 있었다. 바위에 올라가 앉았다. 맞은편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아래쪽은 울창한 밀림이었다. 안내인은 “불과 20년 전만 해도 저 숲에 호랑이가 살았다”고 말했다. 2500년 전, 붓다는 여기서 꽃을 들었다. 아무도 그 뜻을 몰랐다. 뒤에 섰던 마하 가섭만이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그게 바로 ‘염화미소(拈華微笑)’다. 어떤 이는 “붓다가 들었던 꽃은 연꽃”이라고 강조한다. ‘진흙을 뚫고서 올라오는 연꽃’의 메시지를 가섭이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웃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럼 붓다가 장미나 튤립, 혹은 진달래나 개나리를 들었다면 어찌 됐을까. 가섭은 미소를 짓지 않았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가섭은 여전히 미소를 지었을 터이다. 붓다가 들었던 꽃은 하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이 꽃(형상)을 보라”가 아니라 “이 꽃의 바탕(본질)을 보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 붓다가 든 것은 꽃이 아니었다. 꽃이 몸을 비운 자리, 그걸 들고 있었던 거다. 가섭은 그걸 봤던 것이다. 그래서 미소를 지었다. 영축산 정상에서 보이는 저 푸른 산과 들, 꽃과 나무, 바람과 구름이 몸을 비운 자리, 거기서 가섭의 미소가 터져나왔던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붓다도 꽃을 들었다. 붓다의 꽃과 가섭의 미소는 둘이 아니었다. 그건 정확하게 포개지는 하나의 마음이었다. 영축산 정상에는 꽃이 놓여 있었다. 순례객들은 그 꽃을 보고, 또 보고, 또 봤다.

라즈기르(인도) 글·사진=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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