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과 문화

어떤 결혼식에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요즈음 결혼식은 너무 장난스러워져 신성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사라졌다고 개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오래 전부터 결혼주례를 맡아왔는데 주로 충무로 영화인의 가족이나 졸업한 제자들로 벌써 100번째가 훨씬 넘는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결혼식 풍속도가 조금씩 달라져 지금은 신랑이 톡톡히 봉변을 당하는 모습을 가끔 본다. 만세삼창을 부른다든가 신부를 안고 달음박질치는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는데 체력테스트를 한다고 보기 민망한 동작을 강요하고 장모를 포옹하고 볼에 키스를 시키고 신부와 점잖지 못한 문답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신랑.신부는 요령있게 함정을 빠져나간다.

나는 늘 다른 사람과 비슷한 주례사를 하게 되지만 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식을 극도로 짧게 줄이는 것과 연설조의 주례사를 피하고 신랑.신부가 겨우 들릴 만큼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소곤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소란스럽던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진다. 그러나 아무래도 생소한 신랑.신부의 이름을 똑똑하게 발음하고 결혼서약과 선언문을 착오 없이 읽으려면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더욱이 영화촬영이라면 얼마든지 되풀이해 좋은 장면을 만들 수도 있지만 이건 한번으로 끝내는 일이 아닌가.

며칠 전 나는 같은 직장의 직원이 장가를 가게 돼 주례를 서게 되었다. 신부는 야무졌고 신랑은 준수했다. 식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축하연주가 시작될 때 사회자 말대로 흔치 않은 광경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드레스를 걷어올린 신부가 피아노 앞에 앉아 정열적으로 건반을 두들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퇴장순서에서 두 사람은 머뭇거리고 단상을 떠나지 않는다. 자세히 들으니 작은 소리로 무엇인가 다투고 있지 않은가. 사내는 머뭇거리다가 혼인서약을 다시 한번 부탁한다고 했다. 결혼서약에서 신랑이 '네'하는 대답소리가 적어 신부가 그런 남자와 어찌 살겠느냐고 불평한 것이다. 나는 즉각 다시 결혼서약을 되풀이했다. 어른을 공경하고 서로 평생 동안 죽도록 사랑하겠느냐 했더니 신랑은 마이크를 거머쥐고 장내가 떠나갈 듯 '네'하고 소리를 질렀고 이어 폭소가 터졌다. 매사를 정확하게 확인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기상을 보는 것 같았지만 어쩐지 신랑의 앞날이 다소 걱정스러워졌다.

그날 밤 나는 용인에 사는 원로 연극인 L선생이 보내 준 책에서 '요즘 현실을 보면 젊은 사람들이 많이 불안해 매사를 확인하고 넘어가는 것 같다'로 시작되는 '유명 그리고 미지의 여생'을 읽었다. 결혼하고 출산하며 직장에서 부대끼다가 어느덧 젊음과 인생이 모두 흘러가는 과정은 대동소이했고 늙어서 임종하는 장면이 섬세하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너나없이 눈물을 흘리는데 왜 우는 것일까.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떠나서일까. 이룩해 놓은 업적이 아까워서일까. 죽는 것이 싫어서 그럴까.

89세의 연극 연출가는 죽음이 어쩔 수 없음을 알게 되면서 체념하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인간이 바로 죽기 전의 정신이 어떤 상태인지 아직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아 몹시 궁금하다고 했다.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심리현상을 그때그때 녹음이나 글로 써서 기록함으로써 죽음을 향한 인간의, 실상 인간의 정신상태를 밝히고 싶다'고 끝을 맺었다. 이 글을 읽고 낮에 만났던 신랑.신부의 얼굴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혼의 행복과 임종의 슬픔은 정반대의 개념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때로 이것을 결부시켜 충격과 트릭의 효과를 높인다. 초기 프랑스영화를 개척한 조르주 메리어스 감독은 거리의 행인들을 무작정 촬영해 흥행을 했는데 카메라의 고장으로 위대한 트릭을 발견했다. 젊고 아름다운 연인들의 마차가 갑자기 두 개의 관을 실은 마차로 바뀌어버려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영화를 생각하며 살다 보면 극과 극을 대비시키는 엉뚱한 버릇도 생기게 된다.

김수용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