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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자 자임하던 분이…’ 박근혜가 뿔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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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호 07면

올해 1월 5일 열린 한나라당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 참석한 박근혜 전 대표와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중앙포토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화났다. 1일 박 전 대표는 친박을 표방하는 무소속 정수성 예비후보에게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이 사퇴를 종용했다는 의혹에 대해 “우리 정치의 수치”라고 말했다. 정가가 술렁였다. 4·29 재·보선의 쟁점이 ‘민주당 정(丁) 대 정(鄭)’ 갈등에서 한나라당 정종복 후보와 무소속 정수성 후보의 ‘경주 정(鄭) 대 정(鄭)’ 싸움으로 옮겨지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친박 의원들은 “무소속 후보 한 사람 때문에 우발적으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동안 쭉 쌓여 온 문제들을 한마디로 정리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대체 무엇이 박근혜의 화를 불렀는가.

“우리 정치의 수치” 발언 왜 나왔나

사퇴 종용이란 건 초등학생도 알아
정수성 후보는 지난달 31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상득 전 부의장이 29일 이명규 의원을 통해 사퇴를 종용했다”고 주장했다. 이 전 부의장은 “정수성 후보가 22일 먼저 만나자고 했다가 곧바로 취소해 무슨 얘기인지 들어 보라고 지역구(대구)를 방문하는 이 의원에게 부탁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 의원은 “만난 것은 맞지만 사퇴를 종용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수성 후보가) 이기든 지든 박 전 대표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는 대화 내용을 공개하며 “회유나 협박이 아닌데 어떻게 사퇴 종용이냐”고 말했다.

이를 친박 쪽은 사실상 ‘사퇴 종용’으로 해석했다. 수도권의 한 친박 의원은 “친박을 표방하는 후보에게 출마 자체가 박 전 대표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하면 사퇴하라는 얘기 아니냐. 초등학생도 알 만한 얘기”라고 일축했다. 또 다른 재선 의원은 “정 후보가 당선되면 박 전 대표가 (차기 대통령이 되기에) 모자란 지지율 2%를 친이 쪽에서 지원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는데, 이게 협박이 아니고 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박 전 대표는 당을 위해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용히 있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사람을 보냈다는 말이 나오니 심정이 어떠했겠느냐”고 덧붙였다.

친박 의원들은 ‘박연차 리스트’와 관련한 검찰의 친박계 핵심 의원 수사도 이번 발언의 배경으로 지목했다. 한 재선 의원은 “(박 전 대표가) 원칙론자인 만큼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선 말을 안 한다. 그러니 더욱 답답하셨을 것”이라고 전했다. 친박계 좌장 격인 김무성 의원도 “마녀사냥처럼 몰고 갔다”며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실을 문제 삼았다. 손범규 의원은 “확실한 증거도 없이 계속 친박 중진들의 이름이 거론된 게 문제”라며 “며칠만 지나면 무혐의로 밝혀질 것을 검찰이 그렇게 쉽게 피의 사실을 흘린 것은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한 중진 의원은 “겉으로는 친노를 친다지만 사실은 친박계에 대한 경고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라며 “검찰의 ‘성동격서’ 행태에 분노하는 의원이 적잖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귀국도 박 전 대표와 친박계 의원들을 긴장시킨 요인으로 꼽힌다. 한 의원은 “로키든 미들키든 하이키든, (이 전 위원의) 과거 행태를 아는 우리로서는 부담”이라고 말했다. 수도권의 한 친박 의원은 “경선과 지난 공천 때 (이 전 위원이) 너무 심했다. 그게 재연될까 솔직히 불안하다”고 했다. 지난달 30일 정종복 후보가 한나라당 공천을 받은 직후 지도부가 박 전 대표에게 지원 압박을 가한 데 대해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안경률 사무총장이 “박 전 대표도 공천 결과를 존중할 것”이라며 “우리 당 후보를 돕는 게 아름다운 모습 아니겠느냐”고 발언한 것을 두고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사퇴 종용 파문마저 터지자 박 전 대표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게 친박계 의원들의 공통된 얘기다. 한 측근 의원은 “더욱이 이명박 대통령과 박 전 대표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던 이 전 부의장이 사퇴 종용 파문의 당사자로 떠오른 데 대해 매우 불편해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정종복 후보는 지난해 총선에서 친박계 인사를 배제한 ‘공천 3인방’으로 지목돼 당시 경주에서 친박연대 후보에게 패했다. 친박계의 한 재선 의원은 “심판받은 지 1년도 안 된 사람에게 또 공천을 주는 건 원칙에 어긋난다”며 “이 전 부의장의 최측근이기 때문에 ‘낙점 공천’을 한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영남의 한 친박 의원은 “당 대표 시절 투명한 공천 시스템을 만든 데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박 전 대표가 ‘구태 정치’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기분이 어땠겠느냐”고 말했다.

친이·친박 총출동한 허태열 딸 결혼식
일각에서는 박 전 대표의 ‘말의 정치’가 이번에도 통했다고 본다. 공교롭게도 검찰이 2일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이례적으로 김무성 의원 등의 무혐의를 발표했다. 이날 저녁 허태열 최고위원의 둘째 딸 결혼식에는 친박 인사들뿐 아니라 파문의 당사자인 이 전 부의장과 이 의원을 비롯해 청와대와 친이계 인사가 대거 참석했다.
박 전 대표도 결혼식장을 찾았지만 이 전 부의장과 만나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결혼식과 이미자 콘서트 등에서 박 전 대표를 만났던 친박 의원들은 “사석에서도 더 이상의 언급은 없으셨다”고 전했다. 허 최고위원의 딸 결혼식이 끝난 뒤 저녁 모임에서 일부 의원이 김무성 의원에게 “(박연차 리스트와 관련해) 가만 있으면 안 된다”고 건의했지만 김 의원이 “나까지 나서면 당 내홍이 커질 수 있다”며 자제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 전 부의장 측도 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박 전 대표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지난해 총선 때 한나라당 공천에서 친박계 인사가 다수 탈락했을 때도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탈당해 출마하는 친박계 후보들은) 살아서 돌아오라”는 한마디로 24명의 친박 무소속과 친박연대 후보의 당선을 이끌었다. 한나라당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사퇴를 불러온 “오만의 극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중임제 개헌 시도를 무력화한 “참 나쁜 대통령” 발언은 지금도 회자된다.

하지만 파문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정수성 후보가 3일 “이명규 의원이 ‘(친박계인) 진영 의원을 통해 박 전 대표에게 사퇴를 권유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고 주장하면서 ‘진실게임’이 다시 시작됐다. 이 의원은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한 수도권 친박 의원은 “사안이 계속 발생하면 대응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후폭풍을 경계했다. 박근혜의 ‘화(話)’가 다시 나올까. 선거는 29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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