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외환위기와 정책대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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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즈음은 마음이 몹시 허전하다.

대기업 연쇄부도에 맞춰 진행된 동남아 통화위기와 일본의 경기침체 등 대내외 요인으로 우리나라도 심각한 외환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걱정했던 일들이 목전의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정부는 사태가 이렇게 진전될 줄 모르고 있었을까, 아니면 알고도 속수무책이었을까. 노동법 파동과 한보사태후 원칙과 추진력을 겸비한 강경식 (姜慶植) 부총리가 취임할 때만 해도 시장경제원리에 의한 구조조정이 일어나는 것같이 보였다.

또 정치권에서는 1분기 성장이 5%내로 떨어지자 여야가 합심해 경제살리기에 나서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대기업이 연쇄부도를 맞자 원칙과 추진력은 실종되고 여야 공동의 경제살리기도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외국인 투자가가 떠나가도 그만, 우리 경제구조가 건실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정작 원칙과 추진력을 발휘할 시점이 되자 경제에 주는 충격을 우려해 일관성 있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바깥 세상을 보지 못하고 우물안 개구리 신세였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경제에 대한 적신호는 7월부터 켜져 있었다.

일본의 경기가 2분기중 극도로 침체되고 7월초 태국의 바트화가 폭락하면서 동남아 경제가 추락해 불과 석달만에 국제통화기금 (IMF) 구조조정자금이 지원됐다.

국제금융시장에선 이렇게 전광석화 같이 자본이 이동하는데 우리는 상대적으로 무디게 반응했다.

외국인 투자가들이 한국경제에 대해 갖고 있는 불신을 줄이고 외국자본이 이탈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는 대신 외국인의 한국경제에 대한 불안을 근거없는 낭설이라고 일축했다.

이제 우리 경제의 취약성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됐다.

지금은 더 이상 감추려 하지 말고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할 시점이다.

위기극복의 정책기조는 미시적으론 자유시장경제, 거시적으론 재정긴축.통화확대여야 한다.

자유시장경제란 실물자원과 금융자원이 시장기능에 의해 배분됨을 의미한다.

물론 시장기능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금융기관의 부실이 문제될 때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강도 높은 정책을 집행해야 한다.

또 성장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공공성과 외부성이 큰 투자는 정부가 직접 담당하기도 해야 한다.

원칙과 추진력있는 지도자란 바로 이런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끊임없이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사람이다.

더구나 위기타개를 하려면 자유시장 대책만으론 부족하다.

미시대책의 효과는 늦게 나타나는데 비해 거시경제대책의 효과는 바로 나타난다.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환율의 신축적 변동을 허용하는 가운데 금리안정을 위한 재정긴축 - 통화확대의 정책조합을 실시해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가려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무리한 자본자유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외화부족을 해결하려면 통화긴축으로 국내금리를 올린 상태에서 일거에 현금차관을 자유화하고 채권시장을 개방하면 된다.

그러면 정부의 정책이 대성공을 거둔 것 같이 보이지만 바로 이때 불행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단순히 국내외 금리차를 노리고 들어온 자본은 원화가 절하를 맞는 순간 일거에 나가버린다.

해야 할 일은 정부의 대혁신을 통해 재정을 긴축하고 재정긴축의 안정기반 위에서 통화를 확대해 국내금리를 낮추는 일이다.

우리 기업과 은행의 수지를 개선하려면 자금을 지원하는 것보다 대출금리와 예금금리를 낮추고 부동산가격이 폭락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몇 십배의 효과가 있다.

새 경제팀은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발표했다.

상황의 급박성에 비해 정책은 별로 급박하지 않은 것 같다.

이 대책으로 외환위기가 해결되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낮은 것 같다.

이제 정부는 허리를 졸라매자고 국민에게 호소하는 삼류 정부가 되지 말고 허리를 졸라매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시장 기본구조부터 갖추는 일류 정부가 돼야 한다.

박원암 <홍익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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