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면 시골집 마당에서 올려다보던 밤하늘은 그지없이 좋았다. 마치 뛰는 심장 같았다. 은하수는 보석을 뿌려놓은 듯했다. 저편 능선 너머로 별똥이 떨어질 때면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친구 가운데는 언제가 꼭 한 번 별똥을 주우러 가겠다는 아이도 있었다. 결국 그이도 이젠 다 자라버렸지만. 봄 산에는 새가 울고, 부드러운 꽃잎은 바람에 흩날렸다.
그 시절은 알프레드 드 뮈세가 시 ‘롤라’에서 썼듯이 “대지 위의 하늘이 / 신의 백성들 사이로 걸어 들어와 숨 쉬던 시절”이었고, “그때 모든 것은 신성했다. 인간의 고통까지도. / 그때 세상은 오늘날의 세상이 소멸시킨 것을 숭배했다.” 숲과 땅과 하늘과 사람이 타고난 그대로 온전하던 때였다. 내가 선 자리를 중심으로 별들이 내 머리 위를 사방으로 오간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개밥바라기 별이 보고 싶어졌다. 그 별을 넋 놓고 보겠노라고 천문대에 간 적이 한 차례 있긴 했다. 그러나 그날은 구름이 많았다.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보기 위한 대기 행렬의 처음에 섰던 아이는 별을 볼 수 있었지만, 행렬의 끝에 선 나는 결국 보지 못했다. 아이는 탄성을 지르며 내 앞에서 자랑을 늘어놓았다. 부러웠지만 그날의 불행은 어쩔 수 없었다. 대신 그날 나는 한 장의 사진을 인상 깊게 보았다. 사진 아래에는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제목과 함께 “이 빛나는 점을 보라. 그것은 바로 여기, 우리 집, 우리 자신인 것이다. (중략) 인류의 역사에서 그 모든 것의 총합이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 그것은 1990년 무인 우주탐사선 보이저 1호가 지구로부터 64억㎞ 떨어진 태양계 외곽에서 지구를 찍어 전송해 온 사진이었고, 그 사진에 대한 설명 글은 미국의 유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쓴 것이었다. 지구의 보잘것없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더 큰 가치를 얻게 된 한 장의 사진이었다.
지구가 “다른 많은 점들과 분간하기 어려운 외로운 한 개 픽셀(점)”이라니. 순간 나는 내가 지금 이곳에서 살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스스로 질문했다. 그 질문은 돌연한 것이었지만 불가피한 것이었다. 천체로 막 뻗어나갔던 생각이 지구로 귀환하는 우주선처럼 이내 다시 내가 선 자리로 뚝 떨어졌을 때, 나는 잠깐의 충격적인 낙차를 경험했다. 곁에는 아이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를테면 이 놀랄 만한 우주적인 인연에 감사하면서.
주말에 다시 천문대에 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서 가슴에 별을 심고, 별을 키워야겠다. 별의 바탕인 어둠을 보지 말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개밥바라기 별을 보아야겠다. 때마침 ‘100시간 천문학 행사’가 열리고도 있다니까.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