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삼정백조 498가구 ‘10년 속앓이’ 풀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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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여운영 시의원, 이성근 대표회장, 정낙봉·조광현·배군성·오혜환씨, 유춘자 부녀회장, 송영미 관리소장. 조영회 기자

“비록 임대아파트지만 남 눈치 안보고 살아보겠구나, 착실히 저축해 진짜 내 집을 만들어야지, 그런 희망에 부풀었는데….”

아산시 배미동에 있는 삼정백조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이성근(51·공인중개사)씨가 옛날을 회고한다.

이 아파트는 현재 498가구가 살고 있는 10여 년 된 아파트다. 이 아파트는 최근에야 비로소 아산시로부터 사용 승인을 받았다. 입주 10년 만에 진짜 입주 허락을 받은 것이다. 그 사연은 이렇다. 1995년 건축승인과 함께 시공사인 H건설이 부도나고 이후 사업권을 넘겨 받은 S건설 마저 부도가 나면서 업체간 소송이 줄을 이었다.

입주자 대부분은 서민이었다. 보증금 2380만원은 이들에겐 전 재산이나 다름 없었다.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들은 공정률 80%에 불과한 미 준공 아파트에 살림을 차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입주민들은 10년 넘게 미준공 아파트에 살게 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지난 10년 동안 안 다녀 본 곳이 없습니다. 생업은 다들 뒷전이었죠. 처음엔 오기로 시작했는데. 나중엔 책임감 같은 것이 생기더군요.”<103동 대표 배군성(50·건축업)씨>

보통 아파트가 신축 중에 부도가 나면 10년이 아니라 20년이 가도 해결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사업권, 시공권, 공사 업체간 또는 입주예정자 사이에 복잡하게 얽힌 채권 채무 관계를 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산에만 배방면 초원아파트(2005년 공사중단), 신창면 중원에스씨엠(2003년), 법곡동 미림아파트(2000년), 법곡동 센추리산업개발(1997년), 초사동 경문종합건설(2002년), 배방 한도아파트(2001년) 등이 미준공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그러나 삼정백조아파트 입주민들은 달랐다. 이성근 회장 등 입주민 대표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시공사 협력업체와도 협의체를 구성했다. 그들도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행동에 나섰다. 관공서든 민간단체든 가리지 않고 찾아 다니며 억울한 사연을 알렸고 해법을 찾아달라고 호소했다.

“법원 판결만 나면 다 해결될 줄 알았죠.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시공사 부도로 1년 넘게 준공도 나지 않은 아파트에 살아온 주민들에게 ‘하수처리장 분담금을 내라’ ‘도로를 기부 체납해라’ 등 해결해야 할 것들이 줄줄이 나타나 또 몇 년을 싸워야 했습니다.” <105동 대표 정낙봉(38·자동차정비업체 근무)씨>

2005년 법원이 입주민들에게 분양 우선권을 주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릴 때만 해도 다들 ‘이젠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준공을 위해 필요한 조건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업 주체가 사라진 마당에 모든 것을 주민들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환경분담금 문제로 또 다시 3년을 끌었다. 정씨는 20대 초반에 결혼해 삼정백조아파트에 신접 살림을 차렸다. 아내를 위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최근 아파트 사용승인을 받았습니다. 꼭 11년 만입니다. 분양 후 집값도 좀 올랐어요. 요즘 지은 아파트처럼 훌륭하지는 않지만 살기 좋은 아파트를 만들어야지요.” <부녀회장 유춘자(48.돈까스 전문점 운영)씨>

지난해 말 사용승인과 함께 분양을 한 삼정백조아파트는 최근 아파트 분위기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10년이 넘은 아파트지만 주민들 스스로 단지를 꾸미는 일에 적극적이다. 함께 마음 고생하면서 협력해 온 세월이 이들을 가족으로 만들었다. 유씨는 한때 부도난 시공업체가 보낸 건달들과 배짱 좋게 대치하던 상황을 잊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목숨 걸고 지켜낸 아파트인 것이다. 유씨에게 삼정백조아파트는 매매가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아파트다.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아파트입니다. 특히 생업을 뒤로하고 긴 세월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온 입주자 대표들이 존경스럽습니다.”<여운영(40)시의원>

법원 판결 이후 기대를 갖고 찾아온 입주민들을 보는 순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입주민들의 열성과 노력이 감동적이었다. 책임감이나 부담감을 넘어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장 면담도 주선하고 공무원들과 만나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장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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