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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칼럼]일본 산요증권의 도산…대장성도 손든 부실기업 구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일본 증권업계 7위인 산요 (三洋) 증권 본사에는 넓은 공간이 텅 비어있다.

세계 증시 상황을 한눈에 보면서 주식.채권을 거래하던 트레이딩 센터가 있던 자리다.

지난 88년 완공당시 세계 최고를 자랑했던 트레이딩 센터는 거품경제의 붕괴와 함께 경영을 압박하는 흉물이 됐다.

산요증권이 흔들거리면서 대장성이 뛰기 시작했다.

8월 중순 연휴에는 대장성 증권과장이 별장지대를 돌아다니며 휴양중이던 금융기관 거물들에게 직접 "대장성의 산요증권 구제 시나리오에 협조해 달라" 고 요청했다.

그러나 주식시장이 혼미해지고 경기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상황은 꼬이기 시작했다.

한때 흡수합병에 관심을 보였던 산와 (三和) 은행도 "부실회사를 인수하면 주주대표들에게 소송에 걸릴 판" 이라며 발을 뺐다.

은행 - 증권의 진입장벽이 없어지는 마당에 부실 증권사를 인수할 필요가 없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또 국제금융시장에 대장성이 산요증권을 지원한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외국인 투자가도 외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장성이 부실 금융회사 보호와 예금자 보호를 아직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며 서슴없이 일본 금융개혁에 대한 불신감을 밝혔다.

증권국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구제 시나리오는 막판에 대장성 내부에서 제동이 걸렸다.

대장성 사무차관은 증권국 간부들을 불러 "대장성 분리가 논의되는 미묘한 판국에 함부로 나서지 말라" 고 선을 그었다.

정부개입이 무리라고 느끼면서 대장성은 다시 시장원리 쪽으로 돌아섰다.

곧바로 산요증권은 법정관리 신청 준비에 들어갔다.

산요증권의 도산에도 불구하고 큰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금자 보호에 관한 한 정부와 증권업계가 적극 협력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산요증권.야오한 재팬.닛산생명보험등이 연쇄도산하는 과정을 일본 국민들은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다.

화의든, 법정관리든 모든 경영진들은 즉시 물러나고 노조가 생떼를 쓰지도 않는다.

정치권도 개별기업 도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제 한국도 기업도산에 관해 좀더 성숙한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재경원은 "더 이상 부도가 나는 기업은 없을 것" 이라고 공언했지만 도쿄 금융시장에서는 몇몇 그룹이 위험하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고 있다.

시장원리에 따르지 않고 협조융자.부도유예로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다.

더구나 실패한 경영자들이 경영권에 끝까지 집착하는 것은 꼴불견이다.

재경원도 이제 입장을 분명히 정리할 때가 됐다.

개방된 금융시장에서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에는 태양이 너무 크고 밝기 때문이다.

이철호<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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