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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애 엄마처럼 안 보이려 애썼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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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발레 ‘라 바야데르’는 ‘회교사원의 무희’라는 뜻. 다음달 17일부터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르는, 인도 사원을 배경으로 한 스펙타클 대작이다. 여주인공 ‘니키아’는 사원의 무희지만 촉망받는 전사와 금지된 사랑을 나누고, 일국의 공주와는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다. 매혹적이며 섹시하고 대담하다. 그런데 이 캐릭터, 아줌마 발레리나가 맡았다면 쉽게 믿겠는가.

관능미의 화신 ‘니키아’를 연기하는 이는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임혜경(38·사진)씨다. 그는 국내 유일의 아기 엄마 발레리나다. 여섯살 된 딸이 있다. 국내엔 결혼한 발레리나가 드물다. 출산은 꿈도 꾸지 못한다. 하루라도 연습에 게으르면 세밀한 근육에 손상이 오는 발레리나에게 ‘출산=은퇴’라는 건 당연시돼 왔다.

◆치밀한 몸짱 프로젝트=임혜경씨는 2001년 결혼했다. 아이는 2년 후 낳았다. “발레만이 예술이 아니잖아요. 출산은 더 위대한 예술이죠. ” 한창 잘 나가는 발레리나로서 아이를 갖는게 두렵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료했다. “국내에 선례가 없어서 그렇죠, 해외에선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에요. 단 1%의 회의도 없었어요.”

임신 중에도 그는 연습을 빼먹지 않았다. “웃긴건요,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배속 아기가 발로 차고 난리에요. 근데 발레 연습만 들어가면 얌전히 있는 거 있죠.” 그는 제왕절개를 했다. 아기를 낳고 1주일 되는 날 발레단에서 전화가 왔다. “5개월 뒤에 공연이 있는데…. 그때까진 무리겠죠?” 그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당연히 할 수 있죠”라고 답했다. 몸만들기는 그때부터였다.

몸무게는 15㎏이 늘어 있었다. 오후 3시 이후엔 먹지 않았다. 배가 너무 고프거나 입이 근질근질하면 당근을 씹었다. 무조건 안 먹으면 몸이 축나기 마련. 대신 아침과 점심은 영양식을 택했다. 미역국을 먹고, 붓기가 빠지는 호박·전복으로 식단을 꾸렸다. 몸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측정하는 기준은 처녀때 입었던 청바지였다. 하루에도 몇번씩 입어보았다. 처음엔 종아리만, 일주일 지나니 허벅지까지 들어갔다. 엉덩이와 허리를 지나 마침내 바지 단추가 딱 채워지는 순간, 그의 몸은 정확히 임신 전으로 돌아갔다. 출산 후 한달 보름만의 대변화였다.

임혜경씨는 자신이 연기하는 니키아에 대해 “열정적이며 당당하고 도전적인 현대 여성”이라고 평했다.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딸은 내 발레의 원천=겉모습은 돌아왔지만 근력은 형편없었다. 동작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발레 걸음마부터 다시 해야 했다. 체면 버리고 선화예고 학생들 실기 수업에 합류해 죽어라 점핑을 했다. “술 취하면 땅이 올라온다고 하잖아요. 그땐 바닥이 막 저를 끄집어 내리는 것 같았어요. 너무 힘들어 소리를 꿱꿱 질렀어요. 우아함? 사치였죠.”

뻣뻣해진 등 근육을 원래 상태로 만드는 것도 고역이었다. 짧은 시간에 유연성을 키우기 위해 곡예사처럼 허리를 꺾다 삐끗하기도 했다. 이를 악물고 출산 5개월만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대에 섰다. 그 작품이 ‘라 바야데르’였다. 출산 직후 출연했던 작품을 5년 만에 다시 공연하는 것이다.

“그땐 어떻게 하면 아이 엄마가 아닌 것처럼 보일까에만 집중했어요. 지금은 오히려 편안해졌죠. 아이와 일상을 보내다 보면 미혼 발레리나가 도저히 표현하지 못하는 대목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요. 무엇보다 딸 아이가 객석에서 지켜 보고 있다는 게 저를 너무 설레게 만들어요.”

글=최민우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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