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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직 출세 ‘엘리베이터’ 없앤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프랑스에서 가장 확실히 출세할 수 있는 코스여서 ‘엘리베이터’라고 불리는 국립행정학교(ENA)에 대한 개혁안이 25일 공개됐다. 프랑스 정부가 발표한 개혁안의 핵심은 ‘문호는 넓히고 특혜는 줄인다’로 요약된다.

가장 큰 변화는 졸업 등급제 폐지다. 그동안 1∼80등까지 성적에 따라 졸업생들이 배치받는 부처가 결정돼 왔다. 1∼10등은 순위대로 회계감사원과 금융감독원·국사원 등으로 진출했다. 세 기관에서 출발하는 것은 고위 공직자로 승진하는 것을 보장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ENA의 졸업 등급제 앞에는 ‘신성 불가침’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나 올가을부터는 이 성역도 허물어진다. 졸업생들의 전체 성적이 아니라 개별 과목 성적이나 면접 결과를 반영해 정부 부처가 주체가 돼 선발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지난해 “20대의 젊은 나이에 시험 성적 하나로 평생 고위 공직자로서의 길이 보장된다는 건 충격적인 일”이라면서 ENA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또 “졸업생이 부처를 선택할 게 아니라 부처가 졸업생의 적성을 고려해 선발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현재 27개월인 수업 이수 기간도 22∼25개월로 줄인다. 수업 내용도 대학원 과정 성격에 걸맞도록 강의실 교육보다는 현장 실무 교육 등을 대폭 늘리기로 했다. 아울러 공부는 잘하는데 집안이 어려운 학생들에 대한 특별 전형을 도입하기로 했다. 28세 이하의 대학 졸업자 가운데 40여 명을 뽑는 내부 전형 가운데 15명을 극빈 우등생 등 특별 전형 방식으로 전환할 방침이다. ENA 학생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2100유로(약 400만원)의 월급을 받기 때문에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다.

ENA는 이공계의 폴리테크니크·고등사범학교 등과 함께 프랑스 최고의 인재 양성기관이다. 지스카르 데스탱, 자크 시라크 등 대통령 2명과 총리 7명 등 고위 공직자, 대기업 최고경영자 수십 명을 배출했다. 대기업에 진출한 ENA 출신들은 고위 공직자에 오른 ENA 동창들에게 로비를 하는 게 주요 역할이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2007년 대선에서는 프랑수아 바이루 후보는 “ENA의 파벌주의와 엘리트주의가 나라를 망친다”면서 ENA 폐지론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최근에는 기업들이 ENA보다는 경영학 석사(MBA) 출신을 선호하면서 일반 기업 진출을 원하는 젊은이들에게는 큰 인기를 끌지 못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2003년 1162명이던 ENA 응시자가 꾸준히 줄어 지난해에는 934명에 그쳤다. 사르코지 정부에는 ENA 출신 각료가 6명으로 역대 정부 가운데 가장 적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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