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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속의 문화유산]35.세사람의 시조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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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한 40년은 지났을까? 이제는 고인이 된 성악가 테너 이인범 (李仁範) 교수와 주고 받은 이야기다.

나는 그무렵 이 성악가가 출연하는 자리마다 만장을 뒤흔드는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반해 있었고, 더구나 그가 내뿜는 민요가락 '박연폭포' 는 마치 그 폭포의 쏟아지는 물줄기 밑에나 선 듯 내 심신을 다 적셔 옴싹 한기마저 느끼게 했던 것이다.

그날 밤도 나는 그 감동의 물줄기를 맞았었고, 이 폭포 (성악가) 와 자리를 같이 했던 참이라 성악가가 쏟뜨리는 폭포 (聲量) 말고 이번에는 시인이 궁글리는 그 사량 (思量) 의 물줄기 (노랫말) 이야기를 넌지시 건네기로 했다.

즉 우리 민요의 노랫말은 하나같이 그 사물을 즉흥적으로 그려나간 것이 아니라, 그 사물에다 정을 붓고, 눈물을 반죽하고, 한으로 주물러 끈적끈적한 연착성이 있게 했던 것이라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이인범이 부른 노랫말 2절에는 그 연착성이란게 없었던 것이다.

"간데마다 정들여 놓고 이별이 잦아서 못살겠네" 였다.

(지금도 그렇게 불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어린 시절 불렀던 노랫말은 "간데 족족 이별이 잦아서 내 못살겠네" 이다.

'간데 족족' 이라야 참으로 정이들지 '간데 마다' 가지고 어떻게 정이 들겠는가?

그리고 "내 못살겠네" 의 '내' 자는 한번 그네를 구르듯 굴러주는 말이다.

그래야 그네가 하늘로 치솟듯 정도 한도 치솟는 것이다.

아무러나 시는 말씀 (言) 의 종교 (寺) 이고, 시인은 민족어의 연금사 (鍊金師) , 민족어의 사제 (司祭) 이다.

불가 (佛家)에서는 불 (佛).법 (法).승 (僧) 을 삼보 (三寶) 라 이르지만, 시가 (詩歌)에서는 시 (詩).시인 (詩人).모국어 (母國語)가 삼보다.

박재삼의 손길에 빛나는 모국어 여름이 기울어졌는가 했더니 어느새 가을이 흠뻑 물들었다.

금강이 따로 없고, 설악이 한 자리만이 아니다.

시인이 앉는 자리가 금강이요. 시인이 노래 부른 자리가 설악이다.

가을 경색 (景色) 이 아무리 곱다한들 시인이 이를 노래하지 않아보라. 천자만홍 (千紫萬紅) 의 빛무리가 어디서 샘솟겠는가?

궂은 일들은 다 물알로 흘러지이다.

강가에서 빌어 본 사람이면 이 좋은 봄날 휘드린 수양가지를 그냥 보아 버릴까. 아직도 손끝에는 때가 남아 부끄러운 봄날이 아픈 내 마음 복판을 벋어 떨리는 가장가지를 볕살 속에 내놓아… 이길 수가 없다 이길 수가 없다 오로지 졸음에는 이길 수가 없다 종일을 수양이 되어 강은 좋이 빛나네 〈 '수양산조' 全文〉 세상이 있는 법은 가을나무 같은 것 그 밑에 우리들은 과일이나 주워서 허전히 아아 넉넉히 어루만질 뿐이다.

〈 '가을에' 셋째수〉

박재삼 (朴在森) 시인은 우리 시단의 거장 (巨匠) 이요 명공 (名工) 이다.

우리 모국어의 연금술사이다.

우리 모국어가 그의 손길에 가 닿으면 생금 (生金) 처럼 빛을 얻는다.

쟁그렁쟁그렁 소리를 얻는다.

위에 소개한 2편의 시조는 한편은 봄이 생환 (生還) 하는 환희를 '저리고' '아리도록' 노래한 시요, 뒤의 것은 고독한 날의 목숨의 결별을 눈물로 감싸안은 관용과 달관의 숙과 (熟果) 이다.

아무려나 박재삼은 갔다.

낙엽이 지는 철을 기다리지 못하고 낙엽보다 앞질러 세상을 갔다.

'삼천포 앞바다의 잔물결' '옹기전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눈물자국' 다 그냥 두고 시인은 갔다.

진실로의 시인은 진실로 이 민족의 순종 아닌가.

진도개의 순종을 보존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광릉의 크낙새가 사라져 간다고 대서특필인데 시인이 사라지는데는 왜 함구불언인가.

"시인이 괴로워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라는 촌철 (寸鐵) 을 이 땅에 던진 이는 누구였던가?

조운이 새겨놓은 하나의 암각화 박재삼이 지글지글 끓는 상쇠잡이 (꽹과리) 라면, 조운 (曺雲) 은 큰 북을 두드리는 고수 (鼓手) 다.

박재삼이 사금 (砂金) 을 이는 광주리라면, 조운은 광맥을 캐는 곡괭이다.

귀신을 물리는 서편제, 태산을 메아리치는 동편제. 꽃 가지가 스스로 길고 짧을 뿐 (花枝自長短) 이다.

매화 늙은 등걸 성글고 거친 가지 꽃도 드문드문 여기 하나 저기 둘씩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은 것만 남은듯. 〈 '고매 (古梅)' 〉

마치 백두대간이 비스듬이 누워 있듯 묵중하게 누워있는 초장 (初章) . '꽃도 드문드문/여기 하나/저기 둘씩/' .이 중장은 그 우람한 산맥 위에 하나 둘씩 성글게 돋아나는 새벽 별빛이다.

'허울 다 털어버리고/남을 것만 남은듯. ' 이 종장의 무욕 (無慾) 의 경지를 보라. 청담 (淸談) 하다못해 고아 (高雅) 하다.

그 사유의 견고함은 한국이라는 원형질의 바탕 위에 새겨 넣은 하나의 암각화 (岩刻畵) 다.

우리가 흔히 일러 문인화의 극치라는 추사 (秋史) 김정희의 세한도 (歲寒圖) .몇 그루의 꼿꼿한 소나무와 맞배지붕 집 한 채.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리 높이 평가해 주는가?

다만 먹물도 아껴 쓴듯 갈필 속에 번져 나는 그 한기 (寒氣) .다시 말해 그 문기 (文氣) 때문이라면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아 서 있는 쇠꼬챙이 같은 이 고매 (古梅) 한 그루 (시조 한 수) 는 더했으면 더했지 왜 세한도만 못하더란 말인가?

무명씨가 단청 올린 궁궐 한채 우리나라에 시조 (時調)가 있듯이 이웃 나라 일본에는 하이꾸 (俳句) 라는 자기나라 나름의 민족시가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자리 있는 곳마다 이 하이꾸회가 열리고, 여기서 뽑힌 작품을 천작 (天作).지작 (地作) 이라 하며 이 노래 정형을 일러 신의 그릇 (神器) 이라고까지 한다.

어디 그뿐인가.

4백년 전에 살고 간 시인 마즈오 바쇼를 하이꾸의 성인 (聖人) 이란다.

여기에 종사하는 시인만도 6만명, 짓고 따르는 이가 몇 천만명이란다.

일본의 하이꾸가 신기라면 우리 시조는 천기 (天器) .45자 안팎의 그릇에 천지의 말씀을 다 내려앉혀도 자리가 남는다.

하이꾸를 짓고 사랑하는 미국인들도 몇만명을 헤아린다는데 우리는 왜 나라안에서조차 이 천기를 못본체 하는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날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 '청구영언 (靑丘永言)' 중〉

흔히들 애송시니 명시 감상이니 하면 으레 서구 문인들의 이름이 들먹여지게 마련이지만 나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이 '나비야 청산 가자' 를 입에 올려 흥얼거린다.

이름 석자도 남기지 않고 훌쩍 떠나버린 이 명공의, 궁궐보다 더 높은 눈물로 단청 (丹靑) 올린 찬란한 작품을. 박재삼은 너무 일찍 떠나보냈고, 조운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사라졌고, '청산 간 범나비' 는 애달픈 그 명품 (名品) 의 도요지 (陶窯地) 조차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는 안되는데…. 우리 가슴 속을 흐르는 시들도 으리으리한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가꿔나가야만 배달민족으로 길이 살 수 있을 것 아닌가.

정완영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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