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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유래]경기도 평택…땅 생김새가 펑퍼짐한데서 유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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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삼한시절 평택시 (平澤市) 는 마한의 맹주이던 목지국 (目支國)에 속했던 곳이다.

삼국때 일시 고구려땅이기도 했던 이곳은 백제의 하팔현 (河八縣)에 속했다가 신라때부터 팽성 (彭城) 으로 불렸다.

지금은 평택시의 일부이지만 옛날 평택보다 더 각광받던 곳이 진위 (振威) .때문에 진위는 고려 태조23년 (946)에 이미 현 (縣) 으로 대접받았으며 경기도에 편입된 것도 조선 태조7년 (1398) 의 일이었다.

하지만 평택현은 연산군11년 (1505)에 잠시 경기도땅이 됐다가 중종초 다시 충청땅으로 환원, 선조29년 (1596)에는 왜구소탕을 못했다 하여 현에서 강등돼 직산현에 붙여지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그후 일제때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평택군이 수원군의 일부와 함께 경기도 소속인 진위군에 병합됐다가 14년뒤 진위군을 평택군으로 바꿔 대충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평택이란 이름이 등장한 것은 고려 명종때인 1177년 진위를 수주 (水州) 임내 (任內 : 지금의 수원)에서 분리해 현으로 독립시킴과 동시에 팽성현을 충청도 천안부 (天安府)에 편입시키면서 '평택현' 으로 바꾼 것이 처음이다.

원래 땅 생김새가 펑퍼짐한 탓에 곳곳에 못이 생기는데다 장마철이면 서해의 바닷물까지 밀려들어 물웅덩이가 많아 이같이 이름붙여졌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산천계에 '수완산저옥야평 (水緩山底沃野平 : 물은 천천히 흐르고 들은 기름지고 평평하다)' 이라 적고 있다.

하지만 이같이 땅이 너르면서 서해와 가까운 지세 탓에 이곳은 예로부터 툭하면 전장이 되곤했는데 이 때문에 생긴 말이 '평택이 무너지나 아산이 깨지나' 다.

요즘은 '죽기살기로 끝까지 겨뤄보자' 는 뜻으로 잘못 쓰이지만 사실은 조선에 대한 패권다툼에서 비롯된 청일전쟁때, 양대국의 전쟁 틈바구니에서 생명과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던 이땅 민초들의 자포자기식 절규였다.

대원군을 천진으로 납치한뒤 조선에서의 발언권을 높여가던 청을 견제키 위해 일본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채 1894년 7월25일 새벽 아산만 풍도앞바다에 정박중인 청군함을 기습, 격파했는데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의 단초. 이때 청군은 아산 백사포 (白沙浦)에, 일군은 평택에 각각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피란도 못간채 전화 (戰火)에 시달리던 민초들은 '어느놈이 이기든 고달프기는 매한가지' 란 의미로 이같이 신세한탄을 했던 것이다.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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