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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분장에 세밀한 풍자, 네 여자의 웃음 폭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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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일요일 밤 10시쯤 왠지 서운함이 몰려온다면 그건 ‘월요병’의 전조 증상일까, 아니면 KBS-2TV ‘개그콘서트(이하 개콘)’가 끝났기 때문일까(안영미에 따르면 아마도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개콘은 지난해부터 확실히 ‘중흥기’를 맞았다. 연말에 ‘달인’ 김병만에게 상복이 쏟아졌고, 백상예술대상에서는 예능작품상까지 탔다. 최근에는 새 코너 ‘분장실의 강선생님’이 ‘웃다 넘어가는’ 사람들을 속출시키며 대박의 축포를 쏘아 올렸다. ‘버라이어티 쇼’ 만능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정통 코미디 쇼의 맥을 이어가는 개콘의 고고성은 기특하고 값지다. 1999년 시작해 이제 만 10년을 넘긴 이 프로는 ‘전통의 명가’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기본기와 팀워크, 그리고 과감한 시도로 넘볼 수 없는 코미디 쇼의 아성을 구축하고 있다.

맥락 없는 상호 비방, 폭로, 개인기 등 마초적인 토크가 주류를 이루는 ‘예능’의 시대, 개콘이 새로운 전성기를 맞게 된 저력은 어디 있을까. ‘분장실의 강선생님’을 살펴보면 정통 코미디로서 개콘의 차별화된 힘을 느낄 수 있다. 네 여자의 극단적인 분장은 ‘광대’로서 코미디언의 본질을 극대화했다. 우스꽝스러운 꼴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피지컬 코미디’는 가장 원시적인 웃음의 소스다. 조혜련이 ‘골룸’ 분장으로 그랬듯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분장 후 뒤뚱거리는 이들은 여기에 날렵한 세태 풍자를 결합시킨다. 누구나 공감하는 권위의식과 아첨과 복종의 현실을 비꼬는 것이다. 그것도 우스꽝스러운 외모와는 다르게 예리한 시선과 몸짓으로. 그 과도한 분장의 비현실성과 말·행동 속의 서늘한 현실성 사이의 온도 차가 사람을 자지러지게 만든다.

뜨거운 슬랩스틱과 냉철한 풍자, 그리고 잘 계산된 연기가 어우러진 잘 짜인 무대 개그는 훌륭한 작품을 감상하는 기쁨을 안겨준다. 기발한 창의력에 감탄하고 그 뒤에 깃들어 있을 보이지 않는 노력에 공감하게 만드는. 그건 아무리 말발 좋은 버라이어티 쇼의 MC가 줄 수 있는 즉흥적인 즐거움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개콘의 힘은 ‘분장실의 강선생님’ 같은 코너를 여자들에게 맡길 수 있는 과감한 기획력에 있다. 이 분장과 이야기를 남자 개그맨들이 시도했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이렇게 웃겼을까. 안영미가 발을 동동 구르며 징징대는 목소리로 “선배님, 쟤들 땜에 못 살겠어요”라고 계집애같이 칭얼댈 때, “똑바로 해 이그뜰아(이것들아)”라며 가느다란 목소리에 억지로 권위를 덧씌울 때, 흔히 남자들의 세계라고 여겨졌던 억압적인 선후배 관계가 여성에 의해 재현되며 더 희화화된다.

여자들의 개그란 이전까지는 못난 여자가 자기 스스로를 놀리거나, 섹시한 여자를 남자들이 놀려 먹거나, 섹시하지 못한 몸매를 비하하는 데서 머물렀다. ‘분장실의 강선생님’은 기존 ‘여성 개그’의 한계를 돌파하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남자들 못지않은 지독한 분장과 세밀한 풍자의 정곡을 찌르니 새로운 ‘여자들의 개그’가 열린 것이다.

개콘은 그동안 무대를 텅 비운 채 시도했던 ‘닥터 피쉬’, 관객의 낙서를 개그에 도입한 ‘애드립 뉴스’, 혹은 뮤지컬 무대를 그대로 옮겨온 ‘뮤지컬’ 등 계속해 새로운 형태의 개그를 고민해 왔다. 안영미와 강유미는 ‘고고 예술 속으로’에서 홈쇼핑과 만화부터 뉴스까지 장르를 총망라하는 패러디 개그로 실험성을 인정받았고 ‘순정만화’를 통해 여자들만의 코미디를 올려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개콘의 전통의 힘은 개개인이 다져진 연기력으로 그 새로운 기획들을 표현해낼 때 빛을 발한다. 소위 말하는 엄청난 대박 코너가 나오지 않던 지난 1~2년 동안 개콘은 ‘사랑의 카운슬러’ ‘대화가 필요해’ 등에서 유세윤·강유미·신봉선·장동민 등 안정된 연기력의 개그만으로도 오래가는 코너를 만드는 저력을 과시했다. 뒤집어지는 유행어나 거창한 캐릭터를 창출하지 않아도 일상 속 디테일을 잡아채 드러낼 줄 아는 섬세한 연기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시청자의 공감을 쌓아 올릴 수 있었다.

‘분장실의 강선생님’의 경우에도 주인공 격인 안영미가 ‘빵’ 터트리는 웃음을 담당하지만 “음, 그래 쟤들이 뭘 알겠니” 같은 대사들을 딱 떨어지는 톤으로 읊는 강유미의 빈틈없는 연기가 없다면 웃음의 농도는 확 떨어질 듯하다. ‘달인’은 실제 프로그램을 패러디하는 작은 코너로 출발했지만, ‘무림남녀’ 때부터 김병만이 닦아온 액션 코미디의 내공에 능청스러운 표정 연기와 류담 등 조연진의 뒷받침으로 디테일을 더해 가며 장수 히트작으로 컸다.

과감한 실험과 섬세한 기본기로 다져진 전통의 10년이 꽃피운 개콘의 오늘날은 화려하다. 박지선·유세윤·김병만·안상태의 캐릭터 개그, 변기수·박영진 등의 말장난 개그, 박성호·황현희의 풍자 개그, 한민관·이승윤의 몸개그, 악성 바이러스 팀의 패러디와 음악 개그들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개성을 발한다.

몇 분짜리 한 코너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이들은 끝없는 경쟁과 팀 간의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피곤한 일정을 보내겠지만, 그 결과로 나타난 개콘 무대의 에너지는 뜨겁게 폭발한다.
그 순수한 코미디의 결정체가 위로해 주는 주말 저녁은 버라이어티 만능의 시대에도, 또 유행처럼 그 시대가 지나간 뒤에도 계속될 듯하다.

이윤정 문화평론가 [filmpoo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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