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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세 돌보는 100세 할머니 “봉사가 장수 묘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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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오전 7시. 올해 100세인 마콰이춘(馬桂珍) 할머니는 잠에서 깬다. 옆방에 있는 동거노인 라이삼키우(黎三嬌·78) 할머니를 깨워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서다. 딸 같기도 하고 막내 동생 같기도 한 라이 할머니는 척추가 좋지 않아 아침마다 마 할머니의 도움을 받는다. 벌써 5년째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러나 마 할머니는 아직도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그는 “라이 할머니를 아침마다 돕다 보니 내가 동생 같고 더 젊다는 생각이 들어 가끔은 언니라고 부르며 놀린다”고 말했다. 마 할머니가 한 세기를 건너는 나이에도 잔병 없이 정정한 이유다. 그는 홍콩에서 가장 나이 많은 인증된 자원봉사자라고 자랑했다. 라이 할머니는 저녁마다 마 할머니 다리를 안마하는 것으로 보답한다. 마 할머니가 잠들 때까지 노래도 불러주고 옛날 얘기도 해준다.

아침 식사 준비는 옆 침대 찬웅(陳安·78) 할머니 몫이다. 젊은 시절 죽 집에서 주방 일을 한 적이 있는 그는 삭힌 오리알을 넣은 쌀죽 피단저우(皮蛋粥) 요리솜씨가 일품이다. 주말에는 옆집 노인들이 달려들어 함께 죽 잔치를 벌이는 일이 다반사다. 홍콩 주룽(九龍) 반도에 위치한 포람(寶林) 노인의 집(老人之家)에서 살고 있는 마 할머니네 3가족 얘기다.

노인의 집은 1990년 홍콩에서 노인복지 사업을 하는 민간단체인 ‘도움의 손(Helping Hand) 협회’가 저소득 노인들의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했다. 양로원처럼 일방적으로 부양을 받지 않고 노년을 스스로 봉사하며 살아가는 노인 자립형 주택단지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포람 단지에는 가구당 세 명씩 모두 124명의 노인이 둥지를 틀고 있다. 최고령자는 100세인 마 할머니고 입주자 평균 연령이 85세다.

18일 오후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벽에는 온통 사랑을 뜻하는 하트 모양 색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 협회 벨라 룩(陸寶珠) 총간사는 “노인들이 사랑과 봉사로 생활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협회 측이 거동이 불편한 10여 명의 노인을 제외하고 입주자 모두에게 자원봉사자 인증서를 수여한 이유다.

입주자 위원회 주석인 웅충푼(伍俊朋·83) 할아버지는 18일 오전 리푸(李富·90) 할머니와 부근 정부병원에 입원해 있는 노인 3명에게 거주자들이 손수 만든 얌차(飮茶·중국식 스낵)와 음료수를 전해주고 2시간여 동안 이야기꽃을 피우다 왔다. 두 노인이 이날 문병조 당번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매일 두 명씩 돌아가며 병원에 입원한 ‘가족’을 돌본다. 문병조 외에도 편지 우송조, 병원 후송조, 진료 도움조, 연못 관리조 등이 있다. 노인들이 매일 2명씩 짝을 지어 하루 8시간 봉사한다.

노인들의 자기 계발을 위한 각종 강의도 개설돼 있다. 예컨대 월요일은 체조와 영화 관람 등 3과목, 수요일은 수채화 학습과 탁구 교습 등 요일마다 강좌가 다르다. 리푸 할머니는 지난해부터 서예를 배워 하루 3시간씩 연습하고 있는데 90의 나이에 서예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룩 총간사는 “입주자들이 항상 봉사의 대상이라는 편견을 깨고 자기 계발과 봉사의 주체가 됐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앞으로 이 같은 노인 복지 모델을 확대·발전시키고 해외에도 소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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