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잃은'증권사 풍경 “백약이 무효”허탈감만 가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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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증권시장이 5년만에 최저 수준으로 무너지면서 증시의 최일선 현장인 증권사 객장엔 예전에 볼수 없었던 진풍경들이 벌어지고 있다.

원금마저 까먹은 '깡통계좌' 를 들고 한숨만 내쉬는 투자자들이 속속 늘어나는가 하면 주가폭락에 따른 고객들의 성화에 못이겨 아예 잠적해 버리는 증권사 영업직원들이 생겨나고 있다.

대기업의 부도 도미노와 정치권의 불안정이 중단되지 않는 한 증시의 이같은 혼란은 앞으로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침체장세속의 증시백태를 소개한다.

◇ 고객들의 자포자기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 정부의 증시안정대책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급락함에 따라 고객들 사이에 "백약이 무효" 라는 인식이 퍼지며 "이제는 천수답처럼 하늘의 뜻에 따를 수 밖에 없다" 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50대의 한 고객은 "원금이 다 날아가기 직전" 이라며 "담보부족으로 반대매매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고 허탈해했다.

주가 손실에 대해 누구를 탓할 상황도 아니라는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다.

최근의 증시폭락이 증시자체의 문제보다는 기업의 연쇄부도, 정치권 불안정등 증시 외적인 요인에서 비롯됐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돼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해도 주가폭락때면 기물을 부수는등 거칠게 항의하는 투자자들로 더욱 어수선한 객장분위기가 많이 순화된것이다.

◇ 잠적하는 증권사 직원들 늘어난다 = 증권맨들이 어느날 아무런 연락도 없이 잠적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이에 따라 증권사 영업직원에게 주식매매를 일임한 고객들은 재산상의 손실을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어 발을 동동구르는 광경도 생기고 있다.

명동의 한 증권사 과장의 경우 손실규모가 2억원에 이르는 한 고객의 항의를 견디다 못해 자신의 집 문서를 맡기기도 했다.

그는 일임매매가 금지돼 있지만 주식약정을 올리기 위해 고객의 종목을 수시로 바꾸어왔다.

◇ 자기매매로 목돈을 날린 직원들 많다 = 중간정산 퇴직금을 날린 증권사 직원들이 속출하고 있다.

상당수의 증권사 직원들은 지난 4월 중간정산제 실시로 5천~1억원씩의 퇴직금을 미리 받았으나 빚 청산을 미루고 주식투자에 나섰다.

지난 89년 증시 폭락때 빚을 내 투자한 이들은 자기매매나 고객들에게 입힌 손실 보전에 쓰지 않고 모처럼 생긴 목돈을 이용해 빚도 값고 돈도 불리려 했지만 '마지막 총알' 마저 날려버린 것. 대신증권 은철상 (殷鐵相) 명동지점장은 "선거후에도 기업의 부도도미노가 중단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고객들이 무조건 매도세에 가담하고 있다" 고 말했다.

증권전문가들은 이같은 투매현상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자금출처를 묻지 않는 무기명채권의 발행을 허용하는등의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동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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