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검찰의 김대중총재 비자금 수사 유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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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 (金大中) 국민회의총재의 비자금의혹 고발사건에 대해 전역량을 동원해 수사하겠다던 검찰이 하루만에 수사를 대선 이후로 연기한다고 입장을 번복했다.

과거의 정치자금으로부터 정치권 대부분이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서 대선을 앞두고 특정후보의 비자금 문제를 수사할 경우 예상되는 극심한 국론분열과 경제에 미칠 악영향 등을 고려한 결정이라는 김태정 (金泰政) 검찰총장의 설명이다.

검찰의 입장변화는 현실적으로 수사포기 선언으로까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어서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의 시선이 모이고 있다.

검찰의 결정은 대선정국만 놓고 볼 때는 불가피했던 측면도 있다.

金총재의 비자금의혹이 신한국당후보의 지지율 반등을 노린 정략적 의도에서 제기된 것이라 비난 여론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수사를 벌일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에 따라 대선판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어 검찰의 고민이 컸을 것은 뻔한 일이다.

더구나 수사대상이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야당후보라는 점은 검찰로선 위험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또 검찰의 우려대로 수사가 진행되면 조사내용이 중간에 새나가 정략적으로 악용되는 등 수사 자체가 큰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검찰로서는 간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대선 이후로 수사를 유보한 것은 비자금의혹에 대한 판단을 유권자들에게 맡겨 공정한 경쟁의 장을 유지하고 검찰도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명분을 살린다는 의도가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검찰의 본분이 법과 사실에 근거해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란 점에서는 이번 결정은 법논리보다 정치적 고려에 치우쳤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증거자료까지 제시된 고발사건에 대해 검찰이 발을 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검찰의 입장이 하루만에 번복됐다는 사실은 이번 결정이 검찰 스스로의 판단보다 외부의 정치적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다.

검찰 내부에서도 신한국당의 자료입수과정을 포함해 원칙대로 수사해야 한다는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고 하니 이번 결정은 정치상황에 의해 검찰권이 또 한번 왜곡된 사례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배경과 이유가 어떻든 일단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검찰의 결정은 내려졌다.

더 이상 이 문제를 놓고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다만 검찰은 대선 이후로 수사를 연기했다는 결정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무엇보다 다수 여론이 진상을 철저히 밝히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도 벌써부터 만약 金총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수사가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낙선해도 보복조치라는 비난이 있을 수 있어 수사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대선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 검찰은 金총재의 비자금의혹은 반드시 수사를 통해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金총재가 대통령이 된다고 하더라도 의혹을 받는 상태로는 대통령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일이고, 무엇보다 정치권의 비자금문제는 정치문화의 개선을 위해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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