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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 들어있다고?” … 박연차 리스트 실명 거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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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A의원=“박연차(64·구속) 태광실업 회장이 통이 그리 크다는데 난 얼굴도 한번 못 봤네요. 리스트에 이름 없으면 ‘허세’라면서요. 허허.”

B의원=“말도 마시오. 그 리스트에 내 이름이 끼어있다잖아요.”

19일 부산 지역에서 오찬을 함께하던 한나라당 의원 사이에 오간 얘기다. 이날 박희태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는 부산을 찾아 ‘현장 최고위원회의’를 열었다. 회의가 끝난 뒤 이어진 점심식사 자리에선 ‘박연차 리스트’가 화제에 올랐다. 이날 일부 언론에서 박 회장이 돈을 건넨 대상으로 현역 의원들의 실명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이름이 보도된 허태열(부산 북-강서을) 최고위원은 회의에 나오지 않았다.

오찬에 참석했던 한 의원은 “의원들 사이의 대화가 농담처럼 들리긴 했지만 뒤숭숭한 분위기를 감추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부산 지역뿐 아니라 여의도 정치권도 긴장하는 분위기였다. 허 최고위원 외에 한나라당 권경석(창원갑), 민주당 이광재(태백-영월-평창-정선)·서갑원(순천) 의원의 이름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여야가 골고루 섞인 모양새다. 정치권의 관심이 박 회장의 입에 쏠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은 박 회장이 구속되던 시점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정치권과 정보기관 주변에선 다양한 버전의 박연차 리스트가 떠돌아다녔다. 지난 16일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나온 홍준표 원내대표의 발언도 의미심장하다. 그는 “박연차 리스트에 대해선 여야 구분없이 수사하라. 검찰 조직의 명예를 걸고 정치권 부패 스캔들을 반드시 밝혀달라”고 당부했다. 원칙적인 얘기일 수 있지만 불과 사흘 뒤 여야 정치인의 실명이 줄줄이 공개되면서 “홍 원내대표가 상황을 예고한 것”이란 분석도 나왔다.

실명이 거론된 의원들은 모두 ‘결백’을 주장했다. 허태열 최고위원은 “박 회장을 알고는 있지만 10년 이상 본 적이 없고 후원금도 받은 일이 없다”며 “보도한 언론을 상대로 정정보도 신청과 언론중재위 제소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허 최고위원 측 인사는 “허 최고위원은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과 지역구에서 경쟁하던 사이다. 노 전 대통령의 최대 후원인인 박 회장이 왜 허 최고위원에게 돈을 주겠나”고도 했다.

권경석 의원도 “2002년 경남부지사를 그만두면서 김혁규 전 경남지사가 환송회를 열어줬는데 그 자리에서 박 회장을 만났다”며 “김 전 지사에게 전별금 명목의 봉투를 받은 적은 있지만 박 회장으로부터는 한푼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광재 의원은 “합법적 후원금 외에 불법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며 “검찰로부터 소환통보를 받지 못했다. 소환 요청이 오면 적극 응하겠다”고 밝혔다. 서갑원 의원도 “2006년 태광실업으로부터 영수증 처리한 합법적 후원금 이외에는 다른 정치자금을 제공받은 적이 없다”며 일부 언론에 대해 정정보도를 요청했다.

당사자들의 이 같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불안’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여야 정치권 가릴 것없이 무차별적으로 돈을 뿌렸다”는 박 회장에 대한 소문 때문이다.

한 초선의원은 “이름이 공개된 의원들은 친노무현(이·서 의원), 친이명박(권 의원), 친박근혜(허 최고위원)계가 고루 포진됐다”며 “앞으로 박 회장의 발언이 어떤 폭발력을 가져올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가영·임장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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