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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일씨 피살 충격] 정부, 피랍 3주 동안 왜 몰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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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라크 내 테러단체에 의한 김선일씨 피살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김씨가 소속된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이 주이라크 대사관에 밝힌 진술 내용이 23일 공개되면서다. 김씨 피랍 날짜가 5월 31일로 확인됐고, 김 사장이 피랍 사실을 대사관에 알리지 않은 경위도 밝혀졌다.

미 군의관 검시 결과 사망 시간은 22일 오전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궁금증은 남아 있다. 정치권 일각에선 정부와 미군 당국이 피랍 21일 만에 사실을 알게 된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김씨가 살해된 22일 저녁 협상 기한 연장 보도가 나오고, 김씨가 생존해 있다는 진술이 나온 것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이런 의혹들을 풀어야 정부의 초동 대응과 협상력이 검증받게 된다. 정치권 일각에서 얘기하는 미군의 비협조적 태도 의혹도 해소되고, 대미 여론 악화도 막을 수 있다.

◇피랍 날짜 왜 오락가락했나=김 사장의 진술에 따라 피랍 날짜는 뒤바뀌었다. 그는 김씨의 피랍 사실이 21일 새벽 알자지라 방송에 보도된 뒤 주이라크 대사관에 김씨가 17일 납치됐다고 밝혔다. 이후 국내외에 김씨의 피랍은 17일로 보도됐다. 그러나 그는 22일 진술을 두번이나 바꿨다. 오전엔 15일이라고 했다가 밤엔 다시 5월 31일이라고 번복했다. 김 사장은 21일 연합뉴스와의 회견에선 4~5일 전쯤 김씨의 실종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정부 당국자나 언론을 만날 때마다 엇갈린 진술을 한 셈이다.

피랍 날짜는 결국 5월 31일로 확인됐다. 김 사장이 김씨 실종 이후의 독자적인 구명 교섭을 상세히 진술하면서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23일 한나라당을 방문해 "김 사장은 '황망해 정신이 없었다'며 5월 31일 마지막으로 김씨를 봤으며, 이후 다시 연락하니 안 됐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확한 피랍 날짜를 확인하기 어려웠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이라크에서 활동 중인 프리랜서 PD 김영미씨는 MBC와의 인터뷰에서 "가나무역에 확인해 보니 김씨를 5월 31일 이후에 본 적이 없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김씨 피랍 날짜는 김 사장의 잦은 말 바꾸기 때문에 혼선을 빚은 것이다.

◇정부는 왜 미리 몰랐나=김씨는 이라크 주재 한국대사관이 파악 중인 교민 67명의 명단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김씨의 피랍 사실을 21일 오전 4시40분에 알았다고 밝혔다. 알자지라 방송이 있는 카타르 주재 정문수 대사가 이 방송의 피랍 보도 30분여 앞서 본국에 알려왔다는 것이다. 이후 정부는 김천호 사장과 연락하게 된다.

정부는 김씨의 납치를 모른 것은 김 사장이 미리 알려주지 않은 데다 매일 교민들을 체크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김 사장이 김씨가 피랍됐다고 진술한 5월 31일 대사관에 이런 사실을 알려주었으면 정부의 대책은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18일의 이라크 추가 파병 계획 발표 일정도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김 사장은 이를 정부에 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직원들을 동원해 김씨의 소재를 찾아나섰고, 김씨가 납치됐을 가능성이 커진 11일엔 아랍인 변호사에게 "석방 문제를 도와 달라"고 의뢰했다. 이 변호사는 경찰이나 한국대사관에 알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고 김 사장은 진술했다. 다만 김영미씨의 MBC 인터뷰 내용은 주목거리다. 그가 "주이라크 대사관 인사한테 문의했더니 (김씨가 실종된 시점을) 그때(5월 31일)로 추정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미군 당국은 알았나=정치권 일각에서 미군이 김씨 피랍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은 김씨가 팔루자 인근 리지웨이 기지에 파견돼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김 사장의 21일 연합뉴스 인터뷰 내용도 의혹을 낳게 했다.

김 사장은 "미군 측에서 김씨가 미국 KBR업체 직원들과 함께 기지를 떠나 바그다드로 향한 뒤 소식이 없다는 통보를 받고 실종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군이 20일 빨리 좀 보자고 해 모술에 가 대책을 협의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김 사장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하루 뒤 말을 바꾸었다. 김씨의 실종과 관련해 접촉한 곳은 미군 서비스 업체고, 모술에 간 것도 이 회사와의 계약관계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도 우리 정부 문의에 대해 21일 새벽 CNN 방송을 보고 김씨의 납치 사실을 알았다고 밝혔다. 김숙 외교부 북미국장이 확인한 데 대해서다.

이라크 현지 미 다국적군단사령부의 미군 장성도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우리 군 간부가 이라크 다국적군단 사령부에 김씨의 피랍 사실을 알리자 미군 장성도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오영환.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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