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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통화위기 100일] 下. '정책의 실패' 자성 목소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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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싱가포르.콸라룸푸르.방콕.자카르타 = 김종수 기자]동남아 통화위기의 가장 심각한 측면은 이같은 상황전개가 기본적으로 각국의 내부사정에 기인한다는 점이다.

콸라룸푸르의 한 외환딜러는 "10월초 링깃화 폭락을 부른 요인은 마하티르총리의 폭탄발언이었지 그가 주장하는 헤지펀드등 외국투기세력의 공세는 전혀 없었다" 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루피아화의 대폭락 역시 수입대금 결제와 외채원리금 상환을 위한 달러수요가 늘면서 루피아화의 추가하락을 우려한 가수요가 겹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동남아 통화위기의 진원지인 태국의 경우 금융시스템의 붕괴가 경제전체를 수렁에 몰아넣고 있다.

싱가포르의 외환전문가는 "고도성장기에 방만하게 들여온 외자를 부동산과 소비대출등 비생산적인 부문에 무분별하게 퍼주었던 파이낸스회사들의 부실이 태국경제 최대의 불안요인" 이라고 지적한다.

파이낸스회사들은 이미 58개사가 영업정지 상태에 들어갔으나 아직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금융시스템의 붕괴는 태국경제의 신용질서 자체를 흔들고 있다.

무공 (KOTRA) 방콕무역관의 최공림관장은 "요즘은 현찰을 들고 가지 않으면 아무런 거래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 전한다.

여기에는 방콕을 싱가포르 버금가는 지역금융센터로 키운다며 감당할 능력도 없이 금융.외환자유화를 추진한 태국정부와 중앙은행의 과욕도 한몫을 했다.

중앙은행의 한 관계자는 "지나고 보니 자신들의 실책이 컸다" 고 인정했으나 이제와서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다.

신용 붕괴는 인도네시아도 마찬가지다.

자카르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건설공사는 자재난으로 공기에 차질을 빚고 있다.

자재 자체가 부족하다기보다 현찰이 없으면 자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환차손 때문에 기업의 손해가 쌓이고 은행들이 부실채권을 떠안게되면서 이제 현찰밖에 믿을게 없다는 분위기다.

더 큰 문제는 이들 동남아국가들이 금융위기를 넘기고 환율의 안정을 찾는다 해도 종전의 활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데 있다.

통화가치가 떨어지면 수출경쟁력이 되살아 나는게 경제학교과서에 나오는 얘기다.

그러나 저임금에 의존한 이들국가의 수출산업은 중국이 본격적으로 수출전쟁에 참여하면서 경쟁력을 급속히 잃고 있다.

싱가포르의 한 펀드매니저는 "동남아 성장을 주도했던 노동집약산업의 대부분이 중국과 경쟁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의 수출회복에대한 기대를 어둡게 하고 있다" 고 분석했다.

여기다 열악한 교육수준과 낙후된 인프라는 장기적으로 수출회복의 발목을 잡고 있다.

각국 정부들은 재정긴축의 고삐를 바짝 죄는등 경상수지 적자 축소와 환율안정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태국은 야심적으로 추진하던 방콕의 도시교통망 건설계획을 축소하고 도시경전철 일부구간의 공사를 중단했다.

말레이시아도 50억달러 규모의 바쿤댐 건설계획을 연기하고 푸트라자야 행정수도 건설계획도 1단계만 추진하고 나머지는 취소했다.

인도네시아정부 역시 39조루피아 규모의 공공사업을 연기한다고 발표한데 이어 건설예정인 29개 발전소가운데 14개의 착공을 경기가 회복될 때까지 무기 연기하기로 했다.

정부 발주공사의 대폭축소와 연기는 국제수지 개선에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는 내수경기를 위축시켜 성장둔화를 초래한다.

이번 통화폭락으로 동남아 경제가 당장 붕괴할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없다.

그러나 아시아의 차세대 호랑이를 꿈꾸던 동남아국가들은 당분간 그 열망을 접어둘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태국은 그 후유증의 골이 깊고 파장이 넓어 금세기내에 재도약이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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