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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설땅 좁아진 한국경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한국 경제는 올들어 30대 그룹중 이미 다섯개가 쓰러지고 경제위기를 느끼지 못했던 지난해에 60대 재벌중 14개 그룹이 적자를 냈다.

대기업들의 올해 영업실적은 한보와 기아사태에 맞물린 금융위기로 더욱 악화일로에 있다.

그러나 요즘 정부가 발표한 일련의 경기지표는 국민들이 체감 (體感) 하고 있는 실물경제와는 거리가 멀다.

최근의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8월중 우리나라 수출용 출하는 지난해보다 33.4% 증가했고 도.소매판매 증가율은 올들어 가장 높은 5. 6%를 기록했으며, 경기선행지수는 전달보다 1.4% 상승하는 등 6개월째 오름세를 보였다고 한다.

국내의 유수한 연구기관들은 올해 실질경제 성장률이 6%는 넘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러한 통계 숫자에 주로 의지해 국제금융기구의 경제학자들은 한국 경제를 현실 이상으로 낙관하고, 이들의 브리핑에 의존하는 국제통화기금 (IMF) 과 세계은행 고위 당국자들은 지난달 홍콩 연차총회를 전후해 한국정부 당국과 언론들에 이러한 낙관론을 흘려 국민들의 의아심을 자아냈다.

그러나 올해 6% 실질경제 성장 예측은 실 (實) 보다 허 (虛)가 더 많다.

국민총생산 (GNP) 은 생산의 질보다 양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한국 같은 기업환경에서는 경제현실을 왜곡하기가 쉽다.

한국의 기업구조는 석유화학.자동차.철강.반도체등 비싼 설비투자 업종이 많아 24시간 가동률이 높아야 수지타산이 맞게 돼 있다.

이러한 업종일수록 경기침체에 민감하기 때문에 불경기로 국내 수요가 낮아지면 출혈수출을 감수하면서라도 공장 가동률을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외형적으로 수출은 늘고 생산량은 올라가더라도 재고품 증가와 수출덤핑으로 채산성이 악화되고 결국 밑지는 장사가 되고 만다.

우리나라의 수출시장도 미국 등 선진국에서 차차 물러나 중국.동남아.동유럽.옛 소련권 국가등 후진국으로 이동하고 있다.

특히 8천3백억달러로 세계 최대 수입국인 미국시장에서 한국상품은 상대적으로 축출당해 지난 7년 동안 미국 총수입액중 한국 수출품 비중이 30%나 감소했다.

미국등 선진국들의 수입품은 주로 두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하나는 가격이 저렴해 품질이 좀 떨어지더라도 싼맛에 일반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 수입품들이고, 다음은 세계적인 브랜드에 최고 품질을 보장하는 고가 수입품들이다.

전자는 주로 중국.동남아.중남미등 후진국들로부터 들어오는 수입품이고, 후자는 프랑스.영국.이탈리아.독일 등 선진국 제품들이다.

한국상품들은 60년대와 70년대 미국에 첫 상륙했을 때 가격경쟁으로 미국시장에 교두보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과 동남아의 후발개도국들이 80년대와 90년대초 미국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 기업들은 저가품 수출을 지양하고 고품질.고부가가치의 수출품 개발을 등한시한 결과 우리 수출품은 오늘날 선진국 시장에서 설 땅이 없어졌다.

불행히도 한국 수출품은 비싼 인건비.물류비.공장부지값등 3고 (高) 때문에 다른 후진국들과 가격경쟁에 이길 수가 없고, 그렇다고 세계적인 브랜드와 최고 품질을 겸비한 선진국 상품들과도 경쟁할 수 없어 자연히 미국 등 선진국 시장을 빼앗기고 있다.

그러나 미국 등 선진국들은 세계 무역경쟁에서 반드시 놓칠 수 없는 시장이다.

지난해 미국 등 10대 선진국들의 총수입액은 3조3백40억달러로 전세계 1백80여 나라 총수입액의 56%를 차지한 것만 보더라도 한국 경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해선 안될 시장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기업들은 선진국 시장에서 물러서고 그대신 베트남.폴란드.헝가리.우즈베키스탄 등 후진국 시장 개척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

물론 수출다변화도 바람직하겠지만 이러한 다변화가 구미 선진국 시장에서 퇴출과 함께 진행된다면 한국 기업들은 오늘의 안이한 선택으로 21세기 조국의 선진화에 역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선진국, 특히 세계 최대인 미국 시장에서 싸워 이겨야만 우리나라 수출의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 한국 기업들은 양동작전을 써야 한다.

가격경쟁용 수출품들은 임금과 공장부지가 싼 후진국들에서 생산해 선진국 시장에 수출하고 국내 공장에서는 고품질.고가품목들을 생산해 수출할 수 있도록 기업과 정부가 합심 노력해야 한다.

박윤식 <미국 조지워싱턴대 교수,국제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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