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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윤발이 형님이 웃기지 않은 이유

중앙선데이

입력

바바리코트(트렌치코트) 대신 하와이안 셔츠다. 선글라스를 벗은 눈매에 주름 두엇이 씰룩인다. 쌍권총을 휘젓던 ‘간지’는 어디 가고, 감춰 뒀던 도색 잡지를 들키자 한정판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이름은 ‘주윤발(周潤發)’이 아니다. 한자권 현대인은 표준중국어(북경어·보통화)의 발음으로 표기한다는 원칙하에 저우룬파로 불리는 배우. 홍콩 누아르의 ‘따거(大兄)’는 그렇게 귀환했다.

‘드래곤볼’ 실사영화의 변태 노인
12일 개봉한 영화 ‘드래곤볼 에볼루션’은 전 세계 3억5000만 부 이상 팔린 일본 만화가 원작이다. TV 시리즈, 극장판 애니메이션, 게임 등으로 수차례 ‘멀티 유스’ 됐지만, 100% 실사 영화로 제작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할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중국계 제임스 왕 감독이 연출하고, 저우싱츠(周星馳)가 할리우드 자본으로 제작했다. 손오공 역의 저스틴 채트윈과 부루마 역의 에미 로섬 등을 제외하곤 무천도사의 저우룬파, 야무치의 박준형 등 주요 출연진을 아시아계로 꾸렸다. 덕분에 동양의 무술 모험담을 영어권 상품으로 각색한 데 따른 이질감은 적은 편이다.

하지만 영화, 적잖이 실망스럽다. 굳이 원작 만화와 비교할 것도 없다. 손오공 일행이 여의주 7개를 모아 세계 평화를 수호한다는 얼개만 가져왔을 뿐 전체적으론 엉성한 판타지 모험물이다. 수개월간 무술 훈련을 직접 받았다는 주인공들의 액션이 할리우드 청소년에겐 신비로울지 몰라도 소림권법까지 좔좔 꿰는 국내 관객의 눈높이엔 턱없이 모자란다. 기(氣) 사상과 동양 철학으로 군데군데 힘을 줬지만 메이저 배급사의 이름값이 무색할 정도로 난감한 85분이다.
그리고 저우룬파는? 다행히도 원작에서처럼 호색한 변태 노인은 아니다. 멋들어진 권법 실력도 잠깐이나마 보여준다. 그러나 제대로 코믹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폼 나지도 않다. 이 영화를 통해 그를 처음 접하는 청소년이라면, ‘저 아저씬 대체 뭥미(뭐니)?’ 할 정도로 개성 없는 사부다. 그런데 그는 이 영화를 홍보하려고 15년 만에 공식 내한했다. ‘영웅본색’ ‘첩혈쌍웅’ ‘와호장룡’의 저우룬파가!

30ㆍ40대의 ‘싸나이’ 아이콘
“우와, 윤발이 형님을 인터뷰하러 간다고? 무슨 영환데? 엥? 드래곤볼? 거기서 주윤발이 뭘 맡았는데?”
남동생의 환희는 이내 실망으로 화했다. 녀석이 아버지 코트를 걸쳐 입고 까부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는 것도 본 적 없지만, 그랬나 보았다. 녀석도 ‘싸나이’를 그에게서 깨쳤나 보다. 피범벅이 된 채 산에 올라 “홍콩의 야경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어”라고 읊는 ‘×폼’에 빠졌었나 보다. 하기야 오죽하면 지난해 드림시네마와 허리우드극장에서 영웅본색 1, 2편을 20년 만에 재개봉하면서 ‘바바리 차림에 선글라스와 성냥개비를 물고 가면 무료 입장한다’는 이벤트를 벌였을까. 지금의 30, 40대 남자들에게 홍콩 누아르의 형님들은 남자의 아이콘이었고 시대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리고 어느덧 장궈룽(張國榮)은 죽었고, 저우룬파는 늙었다.

‘늙었다’는 말에 오해 마시라. 지난 2월 18일 공식 기자회견 뒤 따로 만났을 때, 그에게선 세월의 무상함보다 관록이 묻어 나왔다. “원작 만화의 변태 캐릭터를 맡았다는 점이 놀라웠다”고 하자 그는 “사실 내게도 변태적인 면이 있다”며 “지금 이 순간에도 잘 관찰하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슬쩍 눙쳤다. “왜 이 영화를 선택했느냐”고 물었을 땐 “이번 영화는 내 의지라기보다 아내가 비싼 가방을 갖고 싶어해 찍게 된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20여 년 전 총탄 40발을 맞으며 죽어가던 ‘싸나이’는 없지만, 쉰네 살의 저우룬파는 연기 이상 깊어진 생활인의 여유를 보였다.

“할리우드에서 배우 생명력 연장”
자신의 이름이 홍콩 영화의 전성기와 함께하던 행복한 10년을 보내고, 1993년 저우룬파는 국제 무대로 나선다. ‘리플레이스먼트 킬러’(98), ‘커럽터’(99) 등에서 액션 주연을 맡긴 했지만 홍콩 시절의 포스는 없었다. 할리우드 영화에도 적잖이 출연했지만 ‘캐리비안의 해적3’(2007)에서 아시아계 해적을 맡는 등 그저 그런 역할들이었다. 그리고 ‘드래곤볼’이라니, “할리우드 진출로 잃은 것이 없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진지하게 “살면서 뭔가를 잃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오히려 얻은 게 있다면…. 서양인이 보는 나는 동양적 시각과 많이 달랐어요. 그 시각 덕분에 다채로운 역할을 맡게 된 것 같아요. 백인 문화권에서 자라지 않은 내가 말런 브랜도 같은 역할을 맡긴 어렵죠. 하지만 배우로서 생명력은 길어졌고 내가 모르던 연기를 발견한 게 만족스럽습니다.”

그는 또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는 아시아 후배들에게 첫째 조언으로 “겸손해져라”고 말했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체력에도 힘써야죠. 또 할리우드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프로답게 자신을 관리해야죠.”
약속한 인터뷰 시간이 끝나갈 즈음 “드래곤볼 7개를 모아 소원을 이룰 수 있다면 무얼 원하나”고 물었다. 그는 한참을 생각했다. 턱을 괸 채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찌푸린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혹시 다시 젊어지고 싶은가.”
눈을 돌려 입을 열었다.
“아니(No).”
검고 고요한 눈동자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원과 함께 씩 웃었다. 그를 추억의 배우로 회고하는 게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제공 20세기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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