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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10. 남산 로드워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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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KBL 창립멤버로 초대 심판위원장을 지낸 백남정씨(左)와 필자.

농구부에 익숙해질 무렵 이희주 코치가 피란갔던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나를 보더니 대뜸 "키가 얼마냐. 그 키로 농구하겠나"라며 기를 죽였다. 그러나 농구부장이던 박순철 체육선생님이 적극 나를 두둔하고 나섰다. 나는 체계적으로 농구 기술을 익힐 수 있게 돼 신바람이 났다.

매일 밤 늦게까지 혼자서 그날 배운 기술을 거듭 연습했다.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본 이희주 코치는 "체격은 작지만 소질은 있어 보인다. 그렇게 열심히 하면 큰 선수가 될 수도 있지"라며 칭찬해주었다. 이 한마디에 나는 용기를 얻어 손가락이 아파 책가방을 들 수 없을 지경이 되도록 농구공과 더불어 살았다.

이 무렵 내 일과는 새벽 남산 로드워크로 시작됐다. 초동 집에서 남산 약수터(지금 케이블카가 있는 곳)까지 달려가 약수 한잔을 들이켜고 맨손체조를 한 뒤 돌아왔다.

그런 어느 날 피곤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오니 아버지가 부르셨다.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씀도 않으시더니 "옜다. 이거 네 거다" 하시며 불쑥 새 농구공을 내미셨다. "아버지!"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지금은 농구공이 흔하지만 당시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미군부대 주변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구해 오신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새벽 로드워크는 농구공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내가 훗날 '드리블의 명수'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도 이때 농구공을 드리블하며 남산 길을 달렸던 덕분이었다.

3학년이 되자 대학 진학 문제에 부닥쳤다. 나는 당시 연세대에서 주전 선수로 활약하던 김영수 선배의 권유로 연세대 입학을 굳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그 선배가 다른 대학으로 옮겨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게다가 그해 발표한 고교 유망선수 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다. 양정고 백남정(KBL 초대 심판위원장)과 경복고 박남희는 끼어 있었다. 나는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이제라도 공부해 대학에 가자"며 입시공부에 열중했다. 2~3개월 책을 잡았을까? 손님이 찾아왔다. 배재고를 나와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고려대에 입학한 주기선 선배였다.

"너 고려대에 오지 않을래? 이번에 전주로 합숙 훈련가는데 거기서 테스트를 받아봐라"라고 권유했다. 나는 백남정.손정채와 함께 전주로 향했다.

여기서 조득준 코치(여자프로농구연맹 조승연 전무의 부친)를 처음 만났다. 그와 한달을 함께 지내며 나는 꼭 그의 제자가 돼야겠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마침내 입시일이 됐다. 백남정은 돌연 연세대로 진로를 바꿨다. 면접관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네가 체육특기생으로 지원한 김영기인가"하며 거듭 확인했다. 필기시험 성적이 좋았던 것이다. 면접관 앞에서 다시 문제를 풀고나서야 커닝 혐의를 벗었다.

내 합격이 구설에 올랐다. 체격도 작고 보잘것 없는 선수를 체육특기생으로 뽑았다는 비난이 조 코치에게 빗발쳤다. 조 코치는 "신입생은 완전한 기성품이 아니다. 나는 김영기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했다"며 당당하게 맞섰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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