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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죽을 때까지 손에서 낙지 안 놓을 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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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땐 매운 양념에 버무린 낙지는 상상도 못했지.”

박무순(92·사진) 할머니는 소위 ‘무교동 낙지’로 불리는 낙지볶음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무교동 낙지를 탄생시켰고, 가장 대중적인 음식 가운데 하나로 성장시킨 주인공이다. ‘원조’라고 주장하는 집이 많지만 박 할머니 앞에만 서면 이내 꼬리를 내린다. 대부분 그에게서 손맛을 배우거나 모방했던 탓이다.

무교동 낙지는 1965년 탄생했다. 장소는 서울 서린동 한국수출보험공사 자리다. 한 대폿집을 인수한 박 할머니가 내놓은 신메뉴가 낙지볶음이다. “낙지가 쌌고, 흔했던 시절이야. 그런데 이를 당시엔 데치거나 국 끓여 먹는 게 전부였지. 그래서 평소 집에 온 손님에게 술안주로 내놨던 것을 선보이기로 했지.”

박 할머니는 상호를 실비집으로 바꿨다. 메뉴는 매콤한 낙지볶음과 이에 어울리는 담백한 조개탕, 그리고 감자탕과 파전이 전부였다. 손님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대박이 터진 것이다. 낙지볶음 한 접시에 막걸리 한 주전자가 전부였던 시절이었지만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얼마 안 돼 유정·미정 등 유명한 낙지집이 생겨났다. 서린동 일대에 열 곳이 넘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밀려드는 손님을 감당하지 못해 박 할머니는 인근에 낙지센타(72년)를 열었다. 소위 분점이었다.

무교동에도 낙지골목이 형성됐다. 당시 손님 대부분은 무교동 오피스타운의 넥타이부대였고, 이들이 서린동과 무교동의 낙지볶음을 ‘무교동 낙지’라 부르면서, 이것이 지금까지 고유명사처럼 이어져오고 있다.

70년대 중반 서린동이 재개발되면서 박 할머니는 청진동으로 옮겨 실비집만 운영했다. 그러다 93년 큰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가면서 가게를 이강순(71) 할머니에게 넘겼다가 2000년 한국으로 돌아와 둘째 아들 이중택(62)씨와 함께 청진동에 ‘원조할머니 낙지센타’를 다시 열었다.

박 할머니의 낙지볶음은 세월이 흘러도 맛이 한결같다. 몇 백원 하던 낙지볶음이 1만6000원, 주전자에 담아 냈던 막걸리가 소주로 바뀌었을 뿐이다. 구순의 박 할머니는 예전에 비하면 거동은 많이 불편해 카운터에 앉아 손님을 맞는 일을 주로 하지만 매일 음식 상태를 점검하는 건 잊지 않는다.

“낙지는 국산이 거의 나지 않는 탓에 중국산을 쓰지. 중국 칭다오에서 큰아들이 최상의 낙지만을 구매해 냉동 상태로 보내주고 있어. 조리법도 마찬가지야. 청양고추와 일반고추를 반반 섞은 고춧가루에 마늘·생강, 설탕 조금 넣는 것뿐이야. 아무리 바빠도 미리 볶아놓는 것도 없지.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지금도 주 메뉴는 낙지볶음과 조개탕(1만원)·감자탕(1만원)·파전(8000원) 등 45년 전 그대로다. 박 할머니는 요즘도 하루에 낙지를 한 접시씩 먹을 만큼 왕성한 식욕을 자랑한다. “손님들이 맛있게 먹을 때가 가장 보람 있지. 죽을 때까지 낙지를 손에서 놓지 않을 거야.”

글=박상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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